AI는 인간에게 빚진 ‘채무자’

2025-08-17     박경만 주필

사람은 AI 없이도 잘 살 수 있다. 하지만 AI는 사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사람에게 신세를 지지않고선 애당초 태어날 수조차 없다. 최신작이라고 할 오픈AI의 GPT-5나, 구글의 최첨단 AI코딩 에이전트 ‘줄스’에 이르기까지 AI는 인간의 온갖 삶의 재료를 콘텐츠로 삼은 것이다. 그 방대한 디지털 코퍼스 덕분에 태어난 것이다. 그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할 까닭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자칫 AI기술을 독점한 슈퍼리치만 배불리며, 채권자인 다수의 인간을 소외시킬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AI가 ‘커닝’한 디지털 코퍼스는 곧 인간만의 ‘코기토’(cogito) 덩어리다. 생각의 텍스트로 짜여진 사유의 결정체이자, 문명 창조의 설계도라 하겠다. 우선은 웹에서 노출된 모든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게시물과 블로그, 포럼, 웹사이트, 위키피디아 편집본, 리뷰, 비디오가 그런 것들이다. 숱한 대규모 언어 모델이나, 뉴스 기사, 사소한 소셜 미디어 잡담도 마찬가지다. AI 개발자들은 이를 ‘훈련 데이터’라고 부른다. 이를 요긴하게 활용해 사람처럼 생각하고, 추론하고, 작동하도록 훈련시킨 것이다. 이 역시 만물을 인식하고 규정해온 인간의 작동방식을 빌려온데 불과하다. 인간 만사, 장삼이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본뜬 것이다.

AI는 애초 인간 문명의 기원에 주목했다. 인간은 여느 피조물과 달리, 유일하게 자연과 ‘거리두기’를 시작했다. ‘자연’을 객관(客觀)하며 자신의 욕망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자연 곧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다른 모습으로 야기(惹起)하고 추상(抽象)하는 고등한 지혜를 발휘했다. 그런 문명을 흉내낸 것이 인공지능의 발상이다. 초기엔 이를 거칠게 흉내낸 약간의 콜드 데이터만 빌렸다. 그러다가 내친 김에 ‘생각’의 유전자가 주입되었다. 그래서 곧잘 세상을 감각하고 해명하며 저작(著作)할 수 있게 되었다. 매번 프롬프트마다 지식과 지혜의 밑재료가 차곡차곡 쌓이곤 했다. 급기야 ‘하나를 배워 열을 깨치는, 상상과 창조의 알고리즘까지 넘보게 된 것이다. AI기술은 그처럼 ‘인간의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에게서 꿔온 재료를 밑천삼아 스스로 지혜의 소산을 크게 불린 것이다.

문제는 채무자 AI로 인해 빚어지는 불평등과 인간 소외다. 어떤 역사적 서사이든, 으레 예비된 결말이 있기 마련이다. 인류의 지능과 경험과 삶의 공식을 그대로 차용한 인공지능 담론도 그렇다. 분명 AI는 인간의 종(slave)이며, 그런 숙명으로 결말지어져야 한다. 허나 언제든 다수 인간을 객체화하며, 배신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뜻있는 명망가들은 벌써부터 “AI가 기왕의 슈퍼리치만 더욱 부유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대신 AI의 채권자인 많은 사람들은 생활고와 실업에 시달릴 것이란 뜻이다. 정작 자신의 모든 아이덴티티까지 AI 개발에 헌납한 다수의 대중은 억울하고 괘씸할 수 밖에 없다.

실리콘밸리에선 이미 그런 상황에 대한 우려가 크다. 애초 무심한 관찰 속에 봉인되었던 일상의 원료에서 AI는 비결을 찾았고, 경험을 재활용했다. 그 덕분에 전혀 다른 기술행위를 재현할 수 있었다. 마치 인간 예술사에서 원근법의 환영(幻影)의 삭제는 물론, 명암법의 안정적 입체감마저 파괴한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런 피카소풍의 ‘파괴’적 변용에서 AI기술혁명이 가능했지 않은가.

그처럼 개발 원천에서부터 인간에게 신세진 AI가 만약 대기업과 투자자들만 부유하게 만든다면? 그러면 전 인류적 차원의 ‘반란’까지도 예상한다. 그래서다. 인간 덕분에 AI가 벌어들인 억만금의 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그게 인류 최대의 과제가 될 것이다. 두말 할 필요없이 AI 아키텍처의 저작권자는 사람이다. 누가 뭐라 해도 AI는 사람에게 저작료를 물어야 할 채무자다. AI 기업들이 돈을 푸는 보편적 기본 소득이 될 수도 있고, 풍요로운 보편 복지를 위해 AI에 중과세가 답이 될 수도 있다. 그 방식은 여러가지다. 방식이 어떠하든 AI는 인류에게 고루 빚을 갚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