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쇼적 ‘트럼피즘’과 실리콘밸리
미시적 관찰만으로 보면, 지금 실리콘밸리를 둘러싼 미국 사회의 작동원리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거의 파시즘 수준이다. 민주주의는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잃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선거에서 패배’하는게 민주주의다. 그 결과 대중 앞에 겸손해지고, 다음 선거의 승리를 위해 시민 다수의 선한 욕망에 충실히 복무하는게 민주주의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인자(因子)는 ‘결핍’이다. 허나 트럼프 행정부는 그와는 거리가 멀다. 마치 이번이 자신들 생애 마지막 권력인양, 모든 결핍된 것들을 게걸스레 채우느라 여념이 없다. 실리콘밸리의 주역들도 앞다퉈 ‘親트럼프’로 전향하느라 바쁘다.
지금 한국 사회도 최고권력자 하나 잘못 뽑은 탓에 복잡하긴 마찬가지다. 바다 건너 실리콘밸리 사정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긴 하다. 그러나 실리콘밸리는 21세기 디지털기술의 메카가 아니던가. 그걸 생각하면 결코 무심할 수가 없다. 하물며 세계가 벤치마킹하던 실리콘밸리의 연구·개발 인프라가 파쇼적 ‘트럼피즘’에 부역하는 모양새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 결과에 따라선 자칫 지구촌 디지털 문명의 학습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과학기술의 진로와 가치를 결정할 매개변수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그래서 최근 실리콘밸리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장인지 모르나, 기술문명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애당초 시작은 일론 머스크다. 본래부터 허풍스런 ‘빌런’ 이미지가 강했던 머스크는 트럼프 시대의 막강한 ‘완장을 찬 머슴’이 되었다. 거액의 선거자금으로 진작부터 트럼프 권력의 주주가 되었나 싶더니, 자신의 밈 코인과 이름도 똑같은 ‘DOGE’(정부 효율성부)란걸 만들었다. 이름만 보면 한 나라 정부를 마음대로 요리하는 ‘상왕(上王)’과도 같다. 마치 조자룡이 헌칼쓰듯, 그는 지난 석달 동안 미국 연방정부를 도륙하다시피 했다. 그 과정에서 연방정부의 기밀을 빼돌렸다는 비판이 있어도 신경 안썼다. 시체말로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할까. 천문학적 규모의 국방부 핵심사업을 ‘스페이스X’로 빼돌리거나, X(옛 트위터)를 정부 공식 소셜미디어로 승격시켰다. 복지 관련 어느 부처는 인력을 90%나 줄이면서, 정작 모든 대외홍보는 X를 통하게 했다. ‘정경유착’이라기보단, 배임이나 뇌물강요, 횡령이다. 그래도 큰 탈이 없는게 지금 미국 정치다.
머스크만은 못해도, 실리콘밸리의 다른 ‘셀럽’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애플의 팀 쿡도 백악관과 트럼프에 줄을 대느라 정신없고, 머스크와 앙숙이던 메타의 저커버그, 오픈AI 샘 앨트먼, 그리고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구글의 순다 피차르 등도 다 마찬가지다. 시총 1~2위를 넘보며 잘 나갔던 엔비디아 젠슨 황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마라라고에서 열린 트럼프 파티에 참가비 100만달러를 내고 참석한 바람에 일단은 대중 칩 수출통제의 ‘면제부’를 받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트럼프가 변심하며, ‘수출 통제’를 을러대는 바람에 다시 곤경에 빠졌다. 요즘 실리콘밸리는 이처럼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기술혁신보다, 트럼프와의 유착에 모든 걸 걸고 있다.
하긴 과학기술 자체가 가치중립 내지 객관적이란 데 대해선 이견이 많다. 말이 좋아 ‘객관’이지, 실상은 그 어떤 권력행위에 의해 조작된 정의·윤리에 스스로를 가두거나, 몰가치적인 인과론에 얽매이곤 한다. 더욱 큰 문제는 그로 인한 과학기술의 인식론적 리스크다. 나찌즘에서 보듯, 민주적, 인문학적 성찰이 표백된 기술은 그 자체가 ‘재앙’이다. 기술만능의 도구를 넘어, 사회 ․ 문화적 역기능을 유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과학이 제 아무리 가치중립성을 견지한다고 하나, 어떤 가치에도 경도되지 않은 객관적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허구”라는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루의 말이 일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쉽게 말해 비뚤어진 영혼을 탑재한 기술은 정치·사회적 흉기가 된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서 비판적 성찰은 더욱 퇴화된다. 현실적 모순이나, 몰가치적 권력에 대한 반성과 저항력은 약화되고 만다. 굳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AI, 양자기술, 합성생물학 따위가 한낱 평범한 악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미국과 실리콘밸리를 지배하는 ‘트럼피즘’하에선 특히 그럴 소지가 크다. 인간을 위한 ‘설명 가능한 AI’(XAI, Explainable AI) 따위는 관심없고, AGI나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휴머니즘적 성찰도 한가한 사치로 치부되기 쉽다. 만인을 위한 디지털 민주주의 대신, ‘만명’만을 위한 기술 엘리티즘이 극성할 수 있다. ‘가슴’이 없는, 회색빛 뉴런이 지배하는 기술만이 기승을 떨지도 모른다.
지금 실리콘밸리를 둘러싼 환경은 그래서 불길하다. 이런 추세라면 미국 주도의 디지털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휴머니즘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고상한 테제를 찾긴 더 힘들 것이다. 빅테크 CEO들이 마치 트럼프의 사열이라도 받듯, 나란히 줄지어 서있는 ‘뉴욕타임스’의 사진은 그 오마주에 다름 아니다. 적어도 요즘이라면 한국이 미국보다 민주적 수위가 높다고 할까. 만약 한국 사회라면 이렇게 대놓고 정경유착하긴 힘들 것 같다. 실리콘밸리 수장들은 그런 식으로 미국판 ‘독재의 평범성’에 기꺼히 동참하고 있다. 잠시, 잠깐의 ‘결핍’을 참지 못해 反민주주의 행렬에 줄을 서고 있는 것이다. 훗날 정권이 바뀌면 분명 뒤탈이 있을 법도 하다. 그래설까. 트럼프는 ‘3연임’을 꿈꾼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