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측 ‘압력’에 굴복? EU ‘AI규제’ 후퇴
EU, ‘파리AI서밋’에서 ‘AI법’ 하위법 ‘AI 책임 지침’ 폐기 ‘빅테크 등에 소비자 피해 입증 불필요’ 규정 등 무력화 “사실상 美 압력 때문” vs “EU, 실용적 입장 선회” 엇갈려
[애플경제 전윤미 기자] ‘파리AI정상회의’에서 이른바 ‘규제 완화’가 강조된데 이어, EU가 기존 ‘AI법’을 어길 경우 이에 상응한 민사상 책임을 부과하기로 한 ‘AI 책임 지침’을 보류 또는 폐기하기로 해 관심을 끈다. 그 동안 미국 실리콘밸리와 글로벌 빅테크의 EU시장 장악의 걸림돌이기도 했던 해당 조항을 사실상 무력화한 셈이다. 이는 사실상 ‘파리AI서밋’에 참석한 JD 밴드 부통령 등 미국측 압력에 굴복한 것이란 해석이 유력하다. 반면에 ‘AI 안전’을 최우선시했던 EU가 실용적 입장으로 근본적인 정책 스탠스를 바꾼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지침 폐기로 ‘소비자의 직접적 피해 청구 경로’ 사라져
이 소식이 전해진 직후 빅테크 등은 ‘환영’ 입장을 밝힌 반면, 유럽 현지 일부 기업이나 시민사회 일각에선 “AI 규정의 효력을 무력화한 것”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앞서 EU집행위원회는 유해한 AI 시스템을 사용하는 기업에 대한 소비자들의 소송 등을 지원하는 등 규제를 가하기로 한 해당 ‘지침’을 폐기하기로 했다. 2022년에 입안된 ‘AI 책임 지침’은 “유해한 AI 시스템에 대한 기존 규칙을 개편하고, 소비자를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EU의 ‘책임 지침’은 원래 EU ‘AI 법’과 함께 상정되었다. 그러나 좀 더 획기적인 규제 법안을 먼저 시행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잠시 뒷전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또 일부 EU 의원들은 이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번 EU집행위원회의 결정 과정에도 의원들 사이에 ‘예측 가능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도 첨가되었다. 대신에 “다른 대안 규정을 입안할 것인지, 또는 아예 다른 유형(규제 완화 등)의 접근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추후 논의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현행 EU ‘AI 법’에는 시민에 대한 보호와, AI 모델 배포의 피해를 모니터링하고 통제하기 위한 조치가 포함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알고리듬 편향과 같은 피해 사항에 대해 AI 개발자를 상대로 소비자가 청구할 수 있는 직접적인 경로는 제공하지 않고 있다. 이에 ‘AI 책임 지침’은 그런 허점을 보완하기 위한 하위 법령이다. 즉, 소비자 피해 청구와 복구의 경로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AI와 관련된 민사상 책임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두는 한편, 소비자가 (빅테크 등을 상대로) 피해를 청구할 경우 이를 지원하기 위해 특별히 제정된 것이다.
그러나 EU 당국이 태도를 바꿔 해당 ‘지침’을 폐기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전략적 실수”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바로 나오고 있다. 현지 언론이 ‘유로 뉴스’ 등에 따르면, 이런 조치는 이번 주 파리에서 개최된 ‘AI 액션 서밋’의 논의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서밋’에서는 AI기술과 관련된 전세계 이해 관계자가 모여 유럽 연합(EU)과 함께 AI 혁신과 미래에 대해 논의했다. 대체로 ‘혁신’을 내건 ‘규제 완화’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였다.
미국 부통령 JD 밴스, ‘파리서밋’에서 강한 ‘우려’
특히 해당 ‘서밋’에선 미국 부통령 JD 밴스의 우려섞인 목소리가 컸다. 그는 EU의 “기술에 대한 강압적인 규제 접근 방식”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밴스는 유럽 기업과 유럽 의회의원들에게 “AI의 새로운 지평을 낙관적으로 보고 두려움을 갖지 말자”면서 사실상 EU가 고수해온 규제를 완화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기조연설을 통해 “우리는 개방성과 협력의 정신으로 우리 앞에 있는 AI 혁명에 착수하고 싶다”면서 “그러나 그런 종류의 신뢰를 구축하려면 창조를 촉진하는 국제 규제 체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상 EU와 유럽 각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 등의 ‘압력’에 EU가 굴복한게 아니냐는 해석마저 나오고 있다.
이에 해당 ‘책임 지침’을 주도했던 EU 의회 대표인 악셀 보스는 이같은 EU의 태도 변화에 대해 “전략적 실수”라고 비판했다. 보스는 ‘유로뉴스’에 “이런 결정은 법적 불확실성, 기업 권력 불균형, 빅테크에만 이로운, AI 책임에 대한 서부 개척식 접근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는 또 “지금의 현실은 ‘AI 책임’이 유럽 AI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을 질식시키는 27개의 다른 국가(미국 등)의 법률 시스템에 꿰어맞춘 패치워크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론도 있다. 즉, “소비자 보호 등 기존 취지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며 옹호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는 주로 미국 기업들의 목소리다. 미국의 SW기업인 페가시스템즈(Pegasystems)의 AI 연구소 소장이자 라이덴 대학교 조교수인 피터 반 더 푸텐은 ‘유로뉴스’를 통해 “이번 조치가 소비자 보호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기존 EU ‘AI 법’과 같은 법규를 감안하면 그 영향은 상대적”이라고 했다.
그는 “(기존 ‘AI 책임’ 규정은) 고객이나, 시민 또는 기업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경우, AI 시스템과, 발생한 피해 간의 심층적인 인과 관계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었다”고 돌이켰다. 그러면서 “그런 내용은 AI 시스템을 운영하는 공공 또는 민간기업이나 공급업체 등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이번 조치는 이처럼 피해에 이르는 인과 관계를 증명하는 내용을 폐기했다는 얘기다. “이에 여전히 소비자와 기관은 여전히 이 법률을 통해 AI 관련 피해로부터 보호받을 것”이며, “이번 결정은 좀더 현실을 감안한 규제 환경을 조성할 것”이라고 두둔했다.
그래서 이번 ‘AI 책임’ 규정의 보류 내지 폐기를 “소비자 보호를 약화하려는 움직임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다만 “AI 규정의 맥락을 약간 정리해서, 결국 기존 규정으로도 해결될 수 없거나, 어차피 원고(소비자 등)가 이기기 힘든 소송을 유발하지 않기 위한 현명한 움직임”이라는게 그의 주장이다.
반론 불구, “전반적으로 ‘AI 안전’ 측면 약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현지 언론들은 “‘AI 책임 지침’에서 ‘철수’하기로 한 결정은 EU가 AI 기업에 맞서 소비자를 보호하려는 노력에서 후퇴한 것”으로 읽히고 있다. 나아가선 ‘AI 서밋’을 통한 미국의 압력때문이란 해석도 나오고 있다.
‘유로 뉴스’ 등은 노골적으로 “이러한 결정의 배경으로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했다. 즉 JD 밴드가 “과도한 규제가 AI 혁신을 죽일 수 있다”고 경고한 지 불과 하루 만에 ‘AI 책임 지침’을 폐기했다는 비판이다. 이로 인해 “EU집행위원회는 앞으로 미국으로부터 AI에 대한 입장을 함께 할 것을 강요하는 등 원치 않는 상황을 겪을 수 있다”고 꼬집었다.
한편으론 EU가 (미국측의 압력 등에 대한) ‘반사적’ 결정이라기보다는 자체적으로 AI 부문에 대한 실용적인 움직임으로 전환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따른다. 그래서 “EU 기반 AI 개발자를 지원하고, 미국 빅테크의 투자를 유치하느라 기존 입장을 고수하지 못할 경우 EU 위원회는 장차 ‘AI 안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을 수 있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