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선과 ‘디지털화폐’의 운명
카말라 해리스의 등장으로 다급해진 탓일까. ‘암호화폐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트럼프가 이번엔 “내가 집권하면 CBDC를 절대 허용않겠다”고 일갈했다. 선거 유세 현장에서 한 말이지만, 결코 빈말은 아닌 듯 하다. 민주당 진영은 이와는 반대다.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에 대해선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러나 CBDC는 미 연준의 한켠에서 은밀하게, 그러나 열심히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지 오래다. 누가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미국 가상화폐는 물론, 세계 가상자산 시장의 기류가 달라질 판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화폐의 조건’ 에 그치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 간 ‘가치전쟁’이자, 이념 생태계의 오래된 논쟁으로 비화될 듯하다.
트럼프는 ‘비트코인 2024’에서 아예 미국을 전세계 암호화폐의 본거지로 만들겠다고 큰소리쳤다. 워낙에 예측 불가한 인물이어서 그럴려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뼈’가 있고, 계산된 말이다. 그는 탈(脫)중앙집권과 자유, 경쟁, 사유(私有)를 신봉하는 보수 진영의 폐부를 찌른 것이다. 가히 ‘선거 마케팅의 달인’이라고 할까. 새삼 돌아보면, 암호화폐 내지 가상화폐의 세상은 좀더 보수적 가치와 근접해있다.
가상화폐는 분명 법화(法貨)가 규율하는 그것과 다르다. 탈중앙의 블록체인과 분산, 전체 노드의 무차별한 참여와 투명성이 생명이다. 참여자들은 방대한 P2P 네트워크 자원을 활용해 개별적인 거래를 확인하고 승인한 후 개개인의 컴퓨터마다 거래원장을 분산, 저장한다. 그렇게 분산된 원장은 블록체인에 참여한 모든 노드가 실시간으로 들여다보고 있어, 속일 수도 없고 해킹도 불가능하다. 이를 감히 관리하고 총괄하는 특정의 ‘중앙’이나 ‘간섭’은 있을 수 없다. ‘탈중앙’ 신화와, 개인의 불가침적 가치만이 그 행간을 채우고 있다. 트럼프는 그 점을 저격한 것이다.
반대로 그는 CBDC를 맹렬히 공격했다. “우리네 삶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고, 모든 돈거래를 감시하며, 당신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빅 브라더’”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물론 트럼프다운 억지일수 있으나, 근거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애초 ‘중앙은행’이 발행한다는 사실부터가 보수 진영의 경계 대상이다. ‘자금세탁 방지’라는 정당한 공권력 행사조차, 보기에 따라선 프라이버시를 위협하는 사찰로 폄훼될 법도 하다. 특히 소비자용 CBDC는 공포의 대상이다. 국가 통화정책이라기보단, 개인의 돈씀씀이와 주머니 사정을 중앙은행이 실시간으로 꿰뚫어 보는 원격 모니터링으로 간주된다. 이에 트럼프는 “내가 집권하면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며 벌써부터 美 연준을 겁박하며 눈을 부라리고 있다.
반면에 진보의 가치는 이와 다르다. 개개인의 존재적 성찰에 터를 두고, 강자와 약자를 아우른 공동체적 공존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무한경쟁에 의해 타인의 삶과 권리를 빼앗고자 하는 공격적인 소유양식을 배척한다. 능력주의와 경쟁지상주의에 맞선 평등 지향의 대안들이 진보적 성찰의 무기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전투적 구호 따위를 금기시한다. 노력한 자,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자만이 그 과실을 향유해야 한다는 능력주의 강론도 뛰어넘는다.
마치 투기판을 방불케 하는 무한경쟁의 암호화폐 시장을 불신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유의 주체나, 사유의 당사자, 영리(營利)의 참가자들을 100% 신뢰하지 않는 셈이다. 대신에 절제된 욕구를 바탕으로 다양성과 평등과 포용(DEI)을 존중하는 세상을 희구하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CBDC는 그런 진보적 가치에 좀더 가깝다고 할까. 디지털 화폐의 작동을 통해 시장에 의한 사이버 자원의 왜곡을 막고, 보편적이고 공평한 배분을 추구한다. 곧 ‘인간’에 대한 불신과 신뢰가 교차하는 것이다.
해리스는 아직 뚜렷한 화폐 철학을 밝힌 적이 없다. 허나 “바이드노믹스에 충실하겠다”는 말에 비춰보아 바이든의 노선을 따를게 분명하다. 암호화폐는 엄격히 규제하고, CBDC와 스테이블 코인에 대해선 관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미국 대선은 ‘화폐’를 매개로 자유와 이성, 두 개의 가치를 둔 이념적 한판 승부가 펼쳐지고 있다. 궁극엔 인간을 어디까지 신뢰할 것인가를 둔 존재적 물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으로선 해리스와 트럼프, 둘 중 누가 당선될지는 사람도, AI도 모를 일이다. 단지 신만이 알 뿐이다. '디지털 화폐'의 운명 또한 신의 결정에 달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