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생태계, 한국 ‘왕따’의 속뜻?

2024-06-24     박경만 주필

내로라하는 빅테크들이 아시아 각국에 대한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 MS, 아마존, 애플, 구글 할 것없이 일본이나 대만, 동남아 각국에 거액을 쏟아붓고 있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는 엔비디아, 인텔 등 반도체 회사들도 마찬가지다. 마치 옛적 서부개척사나 골드러시를 방불케하는 모습이다. 요즘 들어 돌파구가 더욱 절실해서인지 이들은 아시아에서 21세기판 ‘뉴프런티어십’의 꿈을 찾기라도 하듯 열성적이다. 아시아 각국도 잘만 되면 모처럼 디지털 문명의 변방에서 벗어나 ‘허브’로 발돋움할 수도 있는 기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 와중에 한국이 없다. 마치 일부러 쏙 빼놓은 듯, 빅테크들은 한국엔 눈길조차 두지 않고 있다.

반대로 요즘 일본은 신이 났다. MS, AWS, 오라클이 수 십억 달러를 들여 데이터센터를 짓기로 했고, 오픈AI는 아예 일본 지사를 세우고, 아시아 진출의 기지로 삼기로 했다. 하긴 오픈AI뿐 아니다. 판세를 보면, 미국 실리콘밸리의 또 다른 무게중심이 일본으로 빠르게 옮겨오는 듯하다. 일본 스스로도 “다시는 1990년대 인터넷시대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작심을 거듭하고 있다. ‘IT후진국’이란 오명을 씻고, 이제 새로운 ‘AI초강국’으로 거듭하겠다며 자존감이 넘쳐난다. ‘IT한국’을 뛰어넘어 아시아의 ‘AI패권’을 쥐겠다는 속셈도 어렵잖게 포착된다. 아예 TSMC에게 비용 절반을 지원하며, 자국 내에 공장을 짓도록 한 것도 그런 뜻이다. 한국에 빼앗긴 반도체 강국의 지위를 되찾고, ‘잃어버린 20년’을 되찾겠다는 각오다.

그럼 한국은 왜 AI생태계로부터 ‘왕따’아닌 ‘왕따’를 당할까. 이 대목에서 굳이 정책이나 환경탓만을 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일부 언론의 주장처럼 ‘규제가 원인’이라는 식의 눈가림식 진단은 위험천만이다. 정작 이유는 따로 있다. 재생에너지 기반의 RE100은 빅테크들의 필수적인 사업조건이지만, 원자력발전만 외쳐대는 한국과는 거리가 멀다. 빅테크로선 한국에선 설 땅이 없을 수 밖에 없다. R&D 정부 예산이 엄청나게 축소되고, 민간 R&D투자도 크게 줄어든 것도 원인이다. 오죽하면 파운데이션 모델 하나 개발하지 못하고, 생성AI 개발 역시 sLM으로만 연명하려할까.

파운데이션 모델은 제조업 생산의 핵심인 ‘금형’과도 같다. sLM도 물론 효용은 많지만, 미래 국가 AI역량의 비전은 역시 대규모 LLM 개발 능력에 달려있다. 이들은 결코 소홀히해선 안 되는 미래 기술담론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R&D 시국은 그에 필요한 돈도, 인재도 많지 않고, 연구․개발에 목을 맬 열정도 뜨겁지 않다. 쓸만한 인재들이 실리콘 밸리나, 하다못해 중국으로까지 대거 빠져나가는 현실이다.

기우인지 몰라도, 이러다간 정말 ‘재앙’이 닥칠 수도 있다. ‘미래훔치기’가 승패를 결정짓는 AI생태계의 낙오자가 될 수도 있고, 졸지에 ‘IT강국’ 아닌 ‘AI후진국’으로 추락할 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지금은 ‘나노’의 시대다. 물질의 분석 개념이 작으면 작을수록 기술은 더욱 오묘해지고, 그 작아진 미분적 단위만큼 기술 격차는 커진다. 나노 이하 피코, 팸토, 아토, 젭코, 그리고 소수점 아래로 23개 0이 붙는 욕토까지 간다면 더 말할 나위없다. 그 어떤 기술과학이 발달할지 알 수 없다. ‘왕따’된 한국이 처한 미세한 기술적 격차는 나비효과처럼 증폭되어 거대한 ‘창조’ 능력의 차이로 벌어질 수도 있다. 그것이 빚어낼 부(富)의 미래와 격차 또한 상상키 어렵다.

최근까지 이어진 제3의 물결은 생각하는 것, 아는 것, 경험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 SW와 인터넷, 네트워크 등으로 요약된다. 기존 개념을 바꾸려면 개량적 사고에 의한 귀납적 ‘고쳐쓰기’로 충분했다. 그러나 이젠 제4의 물결, 곧 ‘고쳐쓰기’가 아닌, 생성과 창조의 물결이다. 범용AI(AGI), ‘초지능(ASI)’의 예언을 향한 초경험의 언어와 무한상상의 텍스트가 ‘전혀 처음’인 서사를 구성하는 것이다. 엉뚱한 가설이 정설이 되고, ‘정상과학’이 가차없이 부정당하며 기계학습으론 턱도 없는 생성의 컴퓨팅 기술이 난무하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한 ‘인식론적 단절’이다. 자칫 한국이 처한 국제적 AI정세와의 단절이 걱정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심지어 이웃 일본까지도 새로운 기술적 서사와 텍스트의 범람으로 기술 발전의 극한을 넘어설지 모른다. 우리만 홀로 미래를 도둑맞으며, 그 극한의 담벼락 앞에서 주저앉을까봐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