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이 크리에이터

2023-11-12     박경만 주필

약간의 ‘눈썰미’만 있다면 누구나 AI로 뭐든 만들어 내는 세상이 곧 온다. 그 동안 ‘디지털’이란 낱말 앞에선 속수무책이던 사람들도 이젠 어려울 것 없다. 클릭 몇 번만 하면, AI가 스며있는 도구가 알아서 원하는 걸 만들어준다. 현실에선 보기 힘든 ‘가상’의 유명인을 만들어 잡담도 나눌 수 있고, 나만의 챗봇이나 앱을 만들어 즐기거나, 온라인 마켓플레이스에 내다팔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미 2천만명이 사용한다는 ‘캐릭터AI’(Character.ai )니, ‘제피’니 하는 것이 그런 도구들이다. 다시 말해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페르소나 챗봇 기술이다. 정확히는 GPT-3.5나 GPT-4 버전으로 사용자 자신이 원하는 캐릭터를 만드는 ‘일상대화 AI 플랫폼’이다. 자신이 원하는 그 어떤 캐릭터라도 쉽게 만들 수 있다. 미리 대량의 데이터로 사전훈련이 되어서 캐릭터 이름과 프롬프트만 있으면 된다. 만든 캐릭터의 말투나 동작이 좀 어설프다 싶으면 파인튜닝과 RAG(검색증강생성기술)을 동원하면 된다.

생성 캐릭터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 대사를 모아서 재학습을 하면 된다. RAG로 DB에 대사를 저장하고, 사용자 질문과 가장 비슷한 대답을 찾아 프롬프트에 넣는다. 그러면 신통하게도 진짜 실존 인물처럼 말하고, 사용자와 문맥에 맞는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 물론 아직은 완벽하다곤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메타버스 기술보다는 몇 수 위다. 과잉 접속의 디지털 세상이 오히려 더 외로워서일까. 사용자들은 불과 1년 만에 제각각 1,800만개의 AI봇을 만들어, 외로움을 달래거나, 가상의 가족, 친구를 ‘생성’했다.

여기다 오픈AI 샘 앨트먼이 지난 주 다시 기름을 부었다. 이달 말 문을 여는 자체 마켓플레이스 ‘GPT Store’에선 아예 맞춤형 ‘GPT-빌더’를 시판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장삼이사 누구든, GPT로 현실세상에선 불가능할 것 같은 그 무엇이든, ‘가상의 것’을 만들 수 있는 ‘빌더’(builder)다. 짝사랑하는 대상이든, 사별한 배우자든, 아니면 작품이든 앱이든 가리지 않는다. 원하면 ‘GPT Store’에 내다팔아 돈도 벌 수 있다. 물론 그 배경엔 앱스토어 시장을 장악하려는 앨트먼과 그 뒤켠 마이크로소프트의 야심이 작동하고 있다.

그런 야심은 별개로 치더라도, 분명한 것은 스마트폰 이상으로 GPT가 생활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LLM(대형언어모델)의 진화 속도를 보면, 결코 빈말이 아닐 듯 싶다. 이런 식이라면 GPT봇이 스마트폰을 대체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긴 ‘GPT-빌더’가 지배하는 세상은 이미 본 듯도 하다. 바로 온라인 게임의 이치와 다를 바 없다. 온라인 게임의 게이머는 제각각 이야기와 서사, 플롯을 스스로 빈칸이나 ‘괄호’의 여지가 있는 ‘모듈’로 만든다. 그 빈칸에 실시간으로 대체 가능한 무한한 입력값을 채워넣는다. 그 대상 안에서 각각 ‘모듈’ 형태로 분절되어있는 미시적 가치나 행위, 담론 조각들에 대해 참여자 모두는 실시간으로 늘 변용을 가한다. 그들 게이머이자, 참여자들은 곧 다가올 ‘GPT-빌더’ 소비자이자, 크리에이터이기도 하다.

좀 철지난 얘기지만, 그렇게 보면, ‘캐릭터AI’나 ‘GPT-빌더’는 객체지향 프로그래밍(Object-Oriented Programming, OOP)과도 닮았다. 애초 LLM 기반 생성AI가 추구하는 복잡한 문제를 맞춤형 ‘GPT-빌더’, 즉 ‘클래스’로 디자인해서 무수하게 객체화하는 것이다. AI과학자나 사변가들이 의식했든 안했든, 하다보니 ‘이데아론’과도 닮았다. 이데아로부터 개별적 도상과 시뮬라크르가 생성되는 이치와 흡사해진 것 같다. 생뚱맞다 싶게 고대 철학의 원류와, 21세기 최첨단의 기술이 시공을 초월한 기의를 사이좋게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온라인 게임의 경우, 게이머 혹은 사용자는 그 결과를 무한하게 생성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다. 과연 GPT 시대의 참여자들 내지 크리에이터들도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순 없다. 그 결과야 어찌됐든, AI는 이제 기술 엘리뜨들의 품을 벗어나고 있다. 스마트폰처럼, 만인의 소유물이 되고 있다. 누구나 AI ‘크리에이터’가 되는, 그런 세상이 오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만명’의 전유물에선 벗어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