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추억과 ‘디지털 시대’
여행 첫 날, 안달루시아와 세비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마드리드 시내를 벗어나자 나를 압도한 건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과 그와 잇닿은 청명한 하늘이었다. ‘영토는 대한민국의 5배에 이르는 데 사는 사람은 우리나라보다 약간 적다.’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올리브 밭이 지평선을 이룰 정도로 이어지는데도 그 흔한 마을 하나 잘 보이지 않는다. 인구밀도가 적은 나라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행이란 일상에서의 탈출이다. 바로 전 날 비행기에 오르기 전 까지만 해도 미세먼지로 가득 찬 나라에서 빼곡한 일정으로 하루하루 분주하고 각박했던 일상이었다. 그 흔한 여행지의 기본 정보도 습득하지 못하고 그저 유럽의 변방국가 정도로만 인식한 채 떠난 여행이었다. 드넓은 땅과 높고 광활한 하늘을 이고 사는 이곳 사람들이 부럽게만 느껴졌고 일상을 탈출해 이국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스페인을 여행하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 나라는 어디를 가나 ‘올리브! 올리브! 올리브!’의 천국이다. 전 세계 올리브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 된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 나는 올리브의 품질이 세계 최고라고 한다. 올리브 농사에 적합한 토양과 태양의 나라답게 뜨거운 태양열과 일조량, 연간 강수량 800mm 안팎의 건조한 날씨와 적정한 바람이 잘 어울린 작물이 올리브다. 한때 세계제일의 장수국가였고 여전히 높은 수준의 건강과 장수를 누리는 요인도 올리브유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문득, 유럽의 복지가 잘 되어 있는 근원이 식생활에 보편화되어 있는 올리브에서 온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스쳐간다. 이쪽 사람들에게 올리브는 식재료의 핵심이다. ‘복지는 식탁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삶은 먹고 마시는 일상의 반복에서 유지된다.
식탁의 빈부격차는 있을지언정, ‘기초적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열량의 격차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올리브는 유럽, 아니 지중해에서 가장 흔하고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기름이다. 스페인의 식탁엔 늘 올리브유가 있다. 다소 퍽퍽한 빵과 야채 등 여러 가지 식자재들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며 잘 섭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만드는 보편적 복지의 다른 말이, 식탁에서의 올리브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스페인의 일인당 국민총생산은 우리와 비슷하거나 약간 적다. 그런데 세금은 45% 안팎이라고 한다. 20%를 상회하는 수준인 우리나라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그에 반해 병원비가 들지 않고 육아와 교육비가 제로인 나라다. 주택은 임대차 개념으로 정착되어 있고 부동산 가격은 우리에 비해 훨씬 낮다. 우리나라와 비교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 만큼 보편적 복지가 잘된 나라이고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작다.
주택 구입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올인 하다시피 하는 사회, 남한테 뒤떨어지지 않도록 내 자식 교육에 인생을 거는 사회가 낳은 우리들의 자화상은 어떤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왔고, 남보다 더 빨리 빨리 무언가를 이루려고 몸부림치면서 앞뒤 안보고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은 여유롭게 즐기면서 살아간다. 그들의 표정이 그걸 말해준다. 어디를 가나 상점에서 물건값을 내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빨리 빨리’에 익숙해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갑갑하기 그지없다. 우리 여행객 중에는 ‘빨리 빨리’ 안 해주니 그냥 구매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그 ‘빨리 빨리’가 무엇을 위한 ‘빨리 빨리’인가. 내가 살아가는데 그게 무슨 보탬이 될까.
그런 탓일까. 스페인의 디지털 기반의 경제․문화적 발전은 우리에 비해 뒤떨어져 보인다. 이 나라엔 그 흔한 전자자물쇠를 보기 힘들다. 대신에 여전히 열쇠를 갖고 다니며 문을 열고 닫는다. 디지털 기반의 기기 속도도 느리고, 도시는 세계문화유산 유적지는 될지언정 낡고 오래된 모습이다. 스페인은 15~16세기 세계를 제패한 ‘해가 지지않는 나라’였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사는 지금 사람들은 “언제 우리가 그랬던가” 싶게 여유와 느림 속에 사는 듯 했다.
여행을 끝내면서 ‘인간은 왜 사는가.’란 오래된 질문을 다시하게 된다. 스페인에서 느낀 ‘여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 이유였다. 하긴 우리나라는 에스컬레이터 한 줄은 성질 급한 사람들이 걸어갈 수 있게 내어주는 특이한 나라다. 습관이 되어 뛰다시피 걸어가는 출근길의 나를 보면서 하게 되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