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버전의 ‘기본소득’ 담론

2023-04-30     박경만 주필

국내 식자층들도 이젠 AI시대의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여지껏 좌파가 전유한 프로파간다 쯤으로 치부되었던데 비하면 적잖은 변화다. 그 만큼 초대형 AI의 충격이 크다고 해야할까. 설마 “인공지능이 우리 일자리를?” 했던 것이, 이젠 ‘가능성’으로 다가왔고, 그 와중에 기본소득이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친김에 그 전제가 될만한 근원적인 질문을 해봄직도 하다. 일과 노동을 둔 기계와 인간의 대치를 걱정하기에 앞서, ‘우리는 대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를 먼저 탐문해보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교조주의적 유물론은 사실상 폐기되었고, 굶어죽지 않으려면 일해야 한다는, 오랜 기억도 고쳐쓰기 할 때가 되었다. 임금노동의 각박한 현실을 ‘노동의 신성함’으로 신화화하는 시도를 거부할 만도 하다. 한 마디로 이젠 유급노동에 대한 집단의 기억을 탈색할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 AI와 기계 지능이 일하는 덕분에, 일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먹고 살 걱정 안하고, 자족하며 사는 미래를 그리는 것이다. ‘탈(脫)노동’에 의한 탈신화적 전복이라고 할까. 유급노동의 역사를 감싸왔던 침묵을 깨는 것이다.

이미 21세기 선각자 다수가 ‘임금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꾼지 오래다. 거대한 기술적 실업의 파고가 닥칠지도 모를 현실은 그런 상상소가 상상에만 맴돌지 않게 한다. GPT-4에 이어, 연합학습의 경지를 뛰어넘는 기계 이성이 나올 것도 같고, 아예 학습조차 생략한 제로샷의 AI휴먼이 그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런 초지능 기계가 횡행하는 세상에선 기술적 실업을 애써 극복하려는 건 하수다. 되레 AI와 기계에 의한 완전실업을 ‘기대’하는게 상책일 수도 있다. 노동자들이 임금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일의 주체가 되고, 삶의 주역이 되게 하는 것이 현명한 처방일 수도 있다.

그럼 ‘인간은 놀기만 하려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기계에 맡기는 건 유급노동일뿐이다. 대신에 먹고사니즘’의 고삐가 풀리면서 무질서한 난장처럼 모든 인간다운 활동이 흐드러지는 것이다. 다만 그런 개인들의 자유로운 존재방식은 공동체에 대해 어떤 결과도 의도하지 않는다. 그저 생존 노동이 줄어든 덕분에 저마다 내키는대로 존재하며 욕망을 분출할 뿐이다. 그 중 적지않게는 인본적이고 실존적인 활동에 매진할 수도 있다.

그 무질서한 분출의 총량은 그러나 결코 무질서하지 않다. 수많은 개인의 분출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개체와는 전혀 다른 전체적 속성으로 시너지된다. 고용노동 바깥에서 한층 의미있는 삶을 모색하며,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에 덜 개입하면서도 값있는 성취를 도모하는 것이다. 로봇과 인공지능을 인간의 하인으로 부리며 효율성을 높일 수 있고, 공동체의 물질적 풍요를 한껏 늘릴 수도 있다. 그야말로 카오스적 질서를 뛰어넘어, 디지털 시대를 구성하는 복잡계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래서다. 기본소득의 타당성을 둔 왈가왈부는 일단 미뤄두자. 단지 인간보다 기술이 우선되는 소외의 시대에 임금노동과는 별개로, 사회적 수확물을 적절히 나눠줄 좋은 방법을 찾는 노력을 이제 부정할 수 없다. 부와 출생의 뿌리, 혹은 능력과 재능에 근거한 디지털 시대의 귀족,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못한 시민사회를 위한 공존의 공간이 허락되어야 한다. 그래서 더욱 임금과 급부에 매이지 않는 노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사회를 위한 고뇌의 산물이 또한 기본소득이고, 유급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며, 그게 기본이 된 세상이라고 하겠다. 이 즈음 불거진 AI버전의 기본소득 담론을 주시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