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크의 트윗과 ‘백래시’

2022-12-06     박경만 주필

몰(沒)가치와 혐오를 장사 수단으로 택한 것일까. 트윗을 인수한 일론 머스크가 정지되었던 수 천 개의 계정을 모두 ‘사면’했다. 문제적 인물들과 계정이 대부분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이다. 미 대통령 역사상 최악의 돌출 인물이라고 할 도널드 트럼프나, 백인 우월주의자이자 나치 숭배자인 리처드 스펜서, ‘트럼프주의’를 주창하는 스티브 배넌, 신나치 선동가인 앤드류 앵글린 등등이 그런 자들이다. 민주공화정과는 아예 상극인 인물들까지 가리지 않고, 그들에게 트윗의 품을 활짝 열어준 것이다.

트위터는 전통적으로 증오와 괴롭힘을 미화하고, 폭력을 선동하는 잘못된 정보를 마구 퍼뜨리는 계정을 금지했다. 머스크는 그걸 뒤집은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소위 ‘여론조사’를 했고, 그 결과 응답자의 70% 이상이 ‘개방’에 찬성했다. 그러나 기껏 300만명의 응답자가 과연 1억명이 넘는 사용자들을 대의(代議)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 질문 자체가 의도가 뻔한 맥락을 감추고 있다. ‘법을 어기거나 끔찍한 스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계정을 복귀시켜도 되느냐는 거다. 삼척동자도 찬동할 만한 금기사항을 플랫폼 복귀 조건으로 물어본 건데, 당연히 압도적 다수의 ‘찬성’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걸 두고 머스크는 무척이나 ‘있어’보이는 라틴어 구절, “복스 포퓰리, 복스 데이”를 외쳤다. “인민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라는 뜻이다. 자못 방자하다고 할까.

해당 설문부터가 문제다. 마치 “나쁜 게 좋은 것이냐, 아니면 좋은 게 좋은 것이냐” 묻고 답하는 식이다. 그렇다보니 복귀시킨 계정들 중 다수가 법을 어기거나, 끔찍한 스팸 행위를 일삼아온 것들이다. 세기를 거스른 듯한 반동과 혐오로 얼룩진 표상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면 머스크는 왜 이런 일을 서슴지 않을까. 트위터의 외연을 무한 확장시키고, 세계 최고 부자의 자존심에 걸맞은 세계 최강의 여론 매체를 구축하려는 야심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걸 통해 광고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장삿속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그러나 한꺼풀 더 벗기고 보면, 또 다른 머스크의 민낯이 보인다.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자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극우나 파시즘의 일원이라고 함부로 속단할 순 없다. 오히려 온갖 잡설과 망언, 패륜적 담론까지도 수용하려는 태도는 언뜻 비균질적 삶들의 공존을 도모하는 민주적 관용을 방불케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문제다. 곧 과유불급의 자유지상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그는 트위터 인수 직후 ‘작고 효율적인 기업’을 표방하며, 전체 직원의 절반을 잘라냈다. 그 속에서 ‘인간’에 대한 절제와 겸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곤 내세운게 무한대의 표현의 자유와, 어떤 경계도 절제도 없는 감성 표출의 권리다. 이는 필연코 ‘자유’로 포장된 혐오와 차별을 한껏 잉태하며 표출할 수 밖에 없다. 유대인, 여성, 이슬람, 동성애자에 대한 배제와 조롱, 증오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사회나 이질적 집단이 교접하거나, 틈입할 경우 과학적 논증없이 바로 직관적인 반응과 감정이 발효된다. ‘혐오’가 대표적이다. 이는 정교한 사회공학으로 조직화되어, 공동체의 균열을 조장하기도 한다. 이제 트윗이 그 역할을 하게 생겼다. 좀 과장하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트위터의 평범한 매뉴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싶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자유엔 ‘의무’가 따른다. 개인의 평등한 존엄과, 공통의 인간성에 내재된 취약성을 인정하며 겸허해야 할 ‘의무’가 뒤를 받쳐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너나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전능함과 완전함만을 추구하다보면, 그 끝은 오히려 부자유한 디스토피아일 수 밖에 없다. 지금 한국의 최고 권력자부터가 그런 자유주의의 정석과는 거리가 먼 ‘자유’만 되뇌고 있듯이, 자유지상주의자 머스크도 이와 다르지 않다.

급기야 보다 못한 애플의 팀 쿡이 앱스토어에서 트윗을 제외한다고 나섰고, 이에 머스크가 발끈하며 감정 싸움이 벌어졌다. 허나 이 대목에선 머스크 자신을 먼저 탓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안 그래도 지금 세상은 첨단 기술혁명의 한켠에선 세상을 미혹하는 역설이 판을 치고 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식의 무지와 차별, 반(反)공화적 혐오가 알고리즘의 옷을 입고 횡행하는 세상이다. 머스크의 트윗은 그런 이질적 가치에 대한 폭력적 빠롤(Parole) 뭉치들이 매력적인 악화(惡貨)로 소비되며, 떼를 지어 복권되게 했다. 한술 더 떠 전지구적 백래시로, 반동적인 도그마에 판을 깔아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