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루나 사태’에 숨겨진 코드
대략 4~5년쯤 전이던가. 한 방송사 토론회에서 암호화폐를 ‘허황된 신기루’라고 비판했던 유시민 작가에게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그랬다. “선생님이 블록체인을 잘 모르시는 것 같다”고. 그 때 필자는 정 교수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정부 당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거래소를 폐지하거나 거래를 금지시킬 수도 있다”고 호통치던 정부 관계자들을 회색빛 법기능주의에 매몰된 관료들로 되레 호통치고 싶었다. 그랬던 필자가 요즘 들어 좀은 머쓱해졌다.
테라․루나의 무한 폭락이 암호화폐 시장 전반의 신뢰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소위 스테이블 코인이라던 테라는 실상 다단계에 기초한 폰지 사기나 다름없어 보인다. 스테이블 코인답게 1달러와 1코인이 매칭되는 페깅이 아닌, 다단계식 알고리즘의 ‘언스테이블’ 코인이다. 코인 가격(테라)이 떨어지면 연동된 법정화폐인 달러가 아닌, 다른 코인(루나)으로 이를 사들여 '시소처럼' 두 코인 가격의 평형을 맞춘다. 결국 코인을 나중에 산 사람이, 먼저 코인을 산 사람의 이자와 이익을 보전해주는 식이다. 가히 다단계 그 자체라고 해야겠다.
이때 투자자들을 ‘사고팔고’ 과정에 유인하기 위해 ‘테라를 사면 연간 20% 수익을 주겠다’고 약정했다. 문제는 코인으로 수신을 하고, 코인으로 이자를 주는 방식인데, 대부분의 이자를 자사가 또 발행한 코인으로 지급한다. 전문가들이 다단계 ‘폰지 사기’로 지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 계속 이어달리기 식으로 누군가 계속 두 개 이상의 코인을 왔다갔다 사주어야만 앞서 구입한 사람에게 약정한 이자 20%가 돌아갈 수 있다. 그야말로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다.
수 년 전 정재승 교수를 편들었던 필자로선 결코 예사롭지 않다. 거래소 폐쇄 운운했던 금융당국을 지탄했던 만큼 생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생경스럽고 예사롭지 않을 뿐, 빛과 그늘이 교차하는 암호화폐의 본성 만큼은 그때 그대로다. 그에 대한 필자의 사유 또한 크게 달라진 바 없다. 물론 투기를 억제하고, 많은 선의의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가 시급하다는 데엔 어떤 이견도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암호화폐의 욕망을 ‘효용’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그래서 옛적 정 교수의 조언처럼 “암호화폐에 대한 투기 거품이 올바른 방식으로 진정되는 과정에서 얻는 경험”은 무척이나 소중한 자산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럴수록 분산기장 방식의 복잡한 매트릭스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도 중요하다. 가상자산 시장이 어떤 진화를 거듭할지에 관한 고민은 더욱 중요하다. 유시민 작가는 “엔지니어들의 아이디어로 나타난 ‘이상한 장난감’ 갖고 도박하는 것”이라고 했다. 역설적으로 그런 질타도 되새겨볼 만하다. 암호화폐가 더 이상 ‘이상한 장난감’이 아니라, 블록체인의 전위성과 디파이의 증거가 되려면 어떠해야 할까? 탈권위와 분산, 탈중앙의 공유경제를 실현하는 교환수단이 되려면 어떤 실천이 필요한가? 이참에 그런 질문을 던져봄직하다.
또 하나,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은 사실이 있다. 암호화폐 투자자들 상당수가 ‘흙수저’ 탈출에 목맨 젊은이들이란 점이다. 이들 대부분은 ‘타인의 빈곤이 나의 부의 조건’이란 우리 사회의 ‘부의 미래’에 절망한 세대다. 나아가선 우리 사회가 ‘공유경제’ 본래의 가치엔 무관심하고,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며, 공부도 게으르다는 점도 그때와 같다. ‘공유’의 탈을 쓴 가상경제는 결코 평등을 담보할 수 없다. 오히려 공유경제가 왜곡되면 작금의 테라 사태에서 보듯, 디지털 약자들은 단말마적 상황에 몰리며, ‘피’를 토할 수 밖에 없다.
우리 ‘디지털 시티즌’이 할 일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도양단 격이나 우격다짐의 정부 규제만으론 역부족이다. 가상경제와 암호화폐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성찰이 먼저다. 가상자산은 결코 허황된 ‘가상’이 아닌, 치열하고 전투적인 현실의 경제표지다. 그렇다면 약탈과 착취, 불평등의 도식을 제어하고, 상호 공존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그런 대안을 촉구하고 설정해야 할 것이다. 수 년 전 정 교수는 ‘암호화폐 너머’의 것에 주목하라고 했다. 가상경제가 함축하는 깊숙한 코드에 대해 무지한 현실을 탓하면서 했던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필자도 이에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