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겁박’하는 미국과 '로마제국'

2021-10-25     박경만 주필

겁박도 이런 겁박이 없다. 그야말로 ‘칼’만 안들었을 뿐, ‘날○○’나 다름없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최근 행태가 그러하다. 보도에 따르면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포함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에게 기술정보와 영업기밀을 샅샅이 내놓으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압박이 아니라, 협박이라고 해야 맞다. 상세히 관련 보도를 한 국내의 한 언론은 “명백히 ‘경제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물러나고 좀 이성적인 대통령이 백악관 주인이 되었나 싶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개탄했다. 십분 동감한다.

하긴 미국은 요즘 반도체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다. 1990년대만 해도 미국이 전 세계 반도체의 37%를 생산했지만, 오늘날에는 12%에 불과한 현실이다. 그나마 설계 부문에서 인텔 등이 체면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 내의 반도체 제조나 후가공은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그렇다보니 ‘팬데믹’으로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미국 내 수급이 크게 차질을 빚게 되었고, 바이든은 엉뚱한 곳에서 그 해법을 찾으려고 나선 것이다. 삼성을 포함한 글로벌 제조사나 파운드리에게 기술과 영업 노하우를 통째로 내놓으라고 압박하게 된 배경이다.

심지어는 “협조하지 않을 경우엔 ‘국방물자 생산법’을 동원하겠다”며 을러대고 있다. 다른 나라 기업들을 쥐락펴락하기 위해 자국의 법을 강요하고 나선 것이다. 해당 사실을 전한 언론매체의 표현처럼 미국이 아무리 세계 패권국이라고 하지만 다른 나라 기업들한테까지 이래도 되는가 싶다. 더욱이 기가 찬 것은 거래처나 고객사별 매출 비중, 반도체칩 기술과 생산 기간과 방식 등등 무려 20여개 항목을 “오는 11월 8일까지 내놓으라”고 마감 시한까지 정한 것이다. 차려놓은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얹다못해, 아예 밥상까지 빼앗는 격이다.

그러나 정작 미국은 스스로를 각성해야 할 것이다. 자국이 세계 칩 제조 시장에서 뒤처진데 대해 미국 기업인 인텔이나, AMD, 마이크론, 퀄컴 등은 늘 궁색한 이유를 대곤 했다. "글로벌 경쟁사들에게 그 나라 정부들이 거액의 인센티브와 보조금을 제공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조차 이에 동의하지 않는 목소리가 많다. 유력한 테크놀로지 매체인 ‘익스트림 테크’는 대놓고 “이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단언컨대, 미국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 하락을 정부 보조금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그야말로 언어도단이다. 자신들의 기술혁신 부족을 남탓으로 돌리는 것이어서 비겁하기까지 하다. 새삼 한 번 따져보자. 애초 2000년대 초에나 있음직한 90nm(나노미터) 시절을 돌이켜보면 제조와 후가공 부문에서 미국 기업들이 쇠락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반도체 공정이란 늘 새로운 변화에 걸맞게 새로운 노드로 전환해야 한다. 또 당시만 해도 칩 설계 비용이 제조 등에 비해 훨씬 덜 들던 때였다. 그러나 노드 전환의 비용이 많이 들고, 칩 설계 비용이 적었던 시절이 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약삭빠르게 한답시고, 생산이나 조립, 검증, 세팅 등은 모두 삼성전자나 대만의 TSMC로 넘겨버렸다. 나름대로 “부가가치 높은 설계에 집중한다”며 꾀를 부린 것이다. 그 바람에 제조와 후가공에서 경쟁력을 가진 미국 기업들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90nm 라인업을 갖춘 세계 18개 기업 중 미국 기업은 겨우 5개만 남았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 칩 제조의 12%에 그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은 눈앞의 변화를 잘못 읽어냈고, 그 결과 미래를 선점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섣불리 삼성이나 TSMC 같은 기업들에게 제조를 통째로 맡겼고, 나중에야 제조 공정을 복구하며 시장을 겨냥하려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래서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내에 반도체 자급체계를 구축하려고 나섰지만, 자국 언론들조차 “단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못박고 있다. 이번의 무리수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허기가 심해도, 남의 밥상을 통째로 빼앗아서야 되겠나. 21세기 버전의 로마제국을 꿈꾼다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