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차라리 문닫아라!
과연 기업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만큼이나 심각한 것이다. 요즘 ‘페이스북 스캔들’이야말로 그런 근원적 물음을 갖게 한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마약 갱단의 소굴이 되어 범행의 도구로 전락했고, 일부 콘텐츠의 내용이 너무나 끔찍해서 10대 아이들을 자살로까지 몰고갔다고 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페이스북이라는 거대한 기업의 가치와 존재 이유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정작 문제는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와 그 일행들이다. 그와 임원진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서도 방치하거나 묵인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창업 초기 가졌던, 흙수저 젊은이들다운 청초하고 소박했던 그 정신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모든 인류의 순전한 민낯 소통을 꿈꿨던, 정의로운 사업가적 약속은 어찌된 것일까? 그들의 태생이 그렇게 부정의하고 사악했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돈’이다. 저커버그 등이 ‘인간’과 인간성에 둔감하게 된 것은 뭐니뭐니 해도 ‘머니(money)’ 탓이다.
범죄자들이 내거는 거액의 광고는 이들의 정신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마약 카르텔과 인신매매범 등 온갖 흉악한 범죄자들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왓츠앱을 범죄무대로 활개치는 대신, 거액의 광고를 게재하고 있다. 그런 천문학적 숫자의 광고비가 저커버그와 페이스북 사람들을 마비시켜버린 것이다. 여기서 굳이 기업윤리니 사회적 책임이니 하는 고루한 교학적 잣대를 들이대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아무리 돈버는 일이라도 최소한 인간다운 염치와 체면을 잃어선 안 된다는 점만은 일깨우고 싶다.
애초 ‘인간다움’은 곧 ‘공정’과도 통하는 말이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표로 삼는 행위방식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공정경제’는 인간다움을 기반으로 한 공정한 돈벌이가 되어야 하고, 인간을 위한 거래와 이익이라는 가치가 박탈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소규모 생산자나 사업자를 소외시키는 거래, 혹은 착취나 자원 낭비에 근거한 국제무역을 그토록 규탄하는 것도 그래서다. 이는 재화의 생성과 유통, 한계수익의 창출 과정을 통털어 지켜져야 하는 상식이자 윤리다. 특히 진보적 국제사회에서 착취를 배제한 유통채널과 함께 공정노동(아동 착취 금지)의 도덕률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공정’하고 윤리적이어야 할 경제 생태계의 질서를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 바로 페이스북이다. 청소년들은 인스타그램의 끔찍한 영상에 가위눌리고, 자살을 시도했다. 갱단들이 실제 사람을 처형하는 장면이나, 배신자 처단의 증거인 ‘잘려나간 손’을 가득 담은 포대자루가 계정에 게시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인간다움 내지 인간 존엄성 자체를 모독하고, 말살한 처사다. 그런 극악한 행위에 마당을 제공한 페이스북은 ‘공범’이라고 손가락질 당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나아가서 페북은 경제학 원론이 그토록 강조하는 소비자 효용은커녕, 비효용의 극대화를 초래하고, ‘불공정경제’의 전형을 선보였다. 딱히 물리적 재화의 거래만 공정하다고 해서 ‘공정경제’가 되는 건 아니다. “소비자가 이끌되, ‘윤리적’인 소비의 성장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경제학자 알렉스 니콜스의 얘기가 아니더라도, 만인의 행복을 위한 윤리적인 ‘룰(rule)’이 실현되어야만 공정경제다. 그런 점에서 페북은 만인에게 불행한 경험을 목도하게 하며, 불공정한 거래 행위를 이어간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마땅히 퇴출감이다. 세계인을 상대로 천문학적 거금을 매분․초 단위로 긁어모으는 기업인 만큼 더욱 그렇다.
헌데, 소통은커녕 안면몰수의 대가인가. 그 난리 속에서도 저커버그는 명경호수에서 쾌적한 요트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배짱좋은 그에게 고하고 싶다. 이 참에 페이스북의 문을 닫아라! 그게 순결했던 창업 초심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걸핏하면 일탈을 일삼는 다른 글로벌 공룡들에게도 좋은 시범케이스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