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보내는 편지)-"홍콩은 죽지 않았다"
청나라 시대부터 “중국의 현관” 역할 홍콩 국가보안법, 시위 등은 지엽적 문제
1841년 중국의 마지막 왕조이자 여진족의 정복왕조였던 청(淸)나라와 영국이 벌인 아편전쟁으로 중국에서 영국으로 넘어간 섬, 오늘날 우리가 “홍콩(香港, Hong Kong)”이라고 부르는 그 섬과 주변 땅들이다.
이렇게 홍콩의 시작은 남의 나라의 점령이었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뼈아픈 흑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중화사상을 갖고 주변부를 모두 오랑캐(夷)라 부르며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국가라고 중국(中國)으로 칭하던 그들의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가 난 사태가 1841년 청의 아편전쟁 패배와 그로 인한 난징조약이었다. 아니 그 전에 1841년 청나라의 기선과 영국이 맺은 천비가조약에서 이미 영국에게 홍콩을 할양해주기로 했었고 난징조약을 통해 이를 확정했을 뿐이었다. 중국인들은 “서양 오랑캐”(大鼻韃子)들에게 자기 땅을 빼앗긴것도 서러웠고 더구나 한족도 아닌 오랑캐라 업신여기던 여진족이 전쟁에서 져서 그런거여서 더 뼈아팠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감정과 별개로 영국은 프랑스와 손잡고 또한번 애로호 사건을 구실로 2차 아편전쟁까지 일으키고 이번엔 황제가 놀라서 내몽골로 도망간 사이 베이징을 함락시키고 황제의 별궁 원명원에 불까지 질렀으며 이번에 맺은 톈진조약에선 홍콩 위쪽의 육지인 구룡(九龍)반도를 추가로 떼어줬다. 그리고 다시 1899년 이번엔 구룡반도 북쪽의 광활한 황무지인 신계(新界)까지 추가로 조차해줬다.
이렇게 영국의 왕령식민지인 영국령 홍콩(英屬香港, British Hong Kong) 식민지가 탄생했다.
이 식민지는 영국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진 가장 큰 식민지이자 중국 땅에 가진 유일한 식민지였다. 나머지 조차지인 샤먼(夏門), 상하이(上海) 등은 모두 중국이 다스리고 영국은 행정권만 갖는 조계에 불과했다. 통째로 집어먹고 영국 땅으로 만든 곳은 홍콩 하나뿐이었다. 이 거대 왕령식민지는 덕분에 다른 곳들과 조금 다른 기능을 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중국으로 통하는 현관”이라는 기능이었다. 그러니까 중국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이 숨쉬는 거대한 하나의 세계에 들어가는 게이트웨이이자 베이스캠프가 홍콩의 태초부터의 역할이었으며 지금도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19세기 초기 식민지 때는 청나라로 들어가는 역할을 하면서 그 임무를 시작했다.
홍콩은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유럽 다른 나라나 미국 등에서 오는 다른 서양인들도 중국에 가고자 하면 꼭 들리는 곳이었다. 자연히 상하이 같은 다른 개항장들과도 연동이 되었으며 수많은 중국인들이 개항 후 해외로 나가고자 홍콩을 찾았고 거기서 유럽이나 미국, 일본 등으로 유학을 떠나고 일하러 이민을 떠났다. 신대륙인 북미, 남미, 호주 등이나 말레이 반도 등으로 떠난 중국인 저임금 막노동자들인 쿨리들도 홍콩에서 출발했다. 그들 쿨리들 대부분은 고향이 홍콩과 가까운 주강 삼각주였기에 특히 용이했다. 그리고 1911년 신해혁명 연간엔 수많은 야심가들도 홍콩에 자리잡고 중국을 바꾸고자 노력했으며 마침내 여진족 청나라를 몰아내고 아시아 최초 민주공화국인 한족의 중화민국을 건국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홍콩은 이번엔 중화민국과 서방을 잇는 중계지가 되었다. 중화민국은 외세가 중국을 병들게 했다며 외국인이 직접 중국에 들어오거나 이권을 가지지 못하게 막았으며 꼭 홍콩을 통해 중국을 상대하도록 했다. 그 덕에 홍콩의 역할은 매우 중요해졌다. 홍콩은 중화민국에 투자하거나 진출하려는 서양인들의 발판이자 세계로 뻗어나가는 중국인들이 발을 딛고 나가는 발판이자 스키점프대이기도 하였다.
1949년 중화민국 집권당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과 벌인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대륙을 통일하였다. 대륙을 통일한 공산당은 나라 이름을 중화인민공화국이라 하고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바꾸며 “죽의 장막”이라는 커튼을 치는 쇄국정책을 벌였다. 이때부터 홍콩의 중국으로의 발판이라는 기능이 시들해졌다. 그러면서 홍콩은 주석 장난감, 법랑그릇 등 경공업으로 연명하는 그저 그런 동남아시아 도시가 되었으며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진 가내 수공업 형식의 경공업을 하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가전제품 등 전자산업을 시작했다. 중국과의 왕래가 중국 공산화 및 그에 따른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으로 끊긴 덕에 홍콩 스스로의 자구책이 필요했고 그게 바로 홍콩 공업화였다. 그러나 이 공업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74년을 기점으로 당시 세계 최빈국이던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급성장을 이루고 대만으로 피신한 중화민국이 복구를 마치고 공업화에 성공, 한국과 대만 등에서 값 싸고 질좋은 전자제품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며 인구가 절망적으로 적고 공장 부지가 없는 홍콩 입장에선 가격 경쟁력에 밀려서 타격을 받았다.
물론 이 시절에도 중국으로의 관문이라는 기능 자체가 죽진 않았다. 수많은 서방 외신들이 홍콩에 지국을 두고 중국 대륙의 동태를 파악했으며 중국으로 접근하려는 외국인들은 여전히 영국령인 홍콩을 이용해서 중국으로 접근하고는 했다.
그때 바로 새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1979년엔 화궈펑을 밀어낸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이 중국의 개혁/개방을 선언했으며 흔히 흑묘백묘론으로 알려진 실용주의 정책으로 중국을 자본주의 국가로 변모시키고 미국과도 전면적으로 수교하며 중국이 급속히 탈냉전 상태로 가게 된 것이다. 죽의 장막이라는 견고한 커튼이 모두 베어져 사라졌다. 다시 홍콩은 자연스레 개방된 중국으로 가는 관문으로 재조명되었으며 한국 역시 1983년 이후 홍콩을 통해 중국본토와 접촉을 시작했고 홍콩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으로 통하는 관문이라는 역할은 1997년 홍콩이 중국의 특별행정구로서 흡수통합되자 더 중요해졌다. 이젠 같은 나라이니까 말이다. 수많은 중국 국영기업들과 신흥 자본가들이 홍콩증권거래소(HKEX)에 상장했으며 홍콩증시 상장사의 90%를 중국기업들이 점유하기에 이르렀다. 말이 홍콩증권거래소이지 사실상 중국 최대의 증권거래소가 된 셈이다.
다들 알다시피 중국은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갖고 있어서 외국인이 중국 주식시장에 직접 투자하거나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해줄 수 없도록 되어있다. 그러한 불편 때문에 중국 정부는 외자를 유치하고자 상하이증권거래소와 홍콩을 연동하는 후강퉁(滬港通) 및 선전증권거래소와 홍콩을 연동하는 선강퉁(深港通)을 2015-16년에 만들어 외국인들이 홍콩달러로 홍콩을 통해 중국증시에 투자할 수 있도록 열어주었다. 이러한 방법은 분명 중국으로 들어오는 외자를 늘리는 효과가 있었다.
<홍콩섬 센트럴에 위치한 홍콩증권거래소(HKEX). 상장사 대부분이 중국기업이다>
이렇게 중국본토-홍콩 주식시장이 프로그램 매매를 통해 서로 묶인 건 물론이고 중국기업들 자체가 홍콩증시에 상장되어 홍콩에서 외자 투자를 받는 것도 활발하다. 이미 중국 내 주요 기업들이 홍콩증시에 상장되었단 건 이미 언급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메신저 위챗(Wechat)을 개발한 텐센트, 휴대전화 등 전자제품 제조업체 샤오미(小微), 중국 내 최대 시가총액 기업으로서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도 상장된 알리바바(Alibaba), 2021년 9월 부동산 거품붕괴 촉발 우려의 뇌관으로 떠오른 헝다그룹(Evergrande), 중국 내 최대 은행인 다싱은행(大興銀行)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텐센트와 알리바바는 한국인 일반인들에게도 아주 친숙한 기업일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홍콩증시에는 중국의 국영기업들도 상장되어 있으며 그 중에 우량기업들만 뽑아서 모아놓은 H증시도 존재한다. 홍콩 증권시장에는 크게 메인보드로 항셍은행(恒生銀行)이 만든 항셍지수, 중국 국영기업 중 우량주를 모은 H지수, 그리고 스타트업 등을 모은 한국의 코스닥 같은 역할을 하는 GEM지수 등 세가지 지수가 존재하는데 이 세가지 지수 모두 중국기업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홍콩경제가 중국과의 연동률이 강하고, 좀 거칠게 말해선 중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된 지 오래라는 것이다. 그리고 2021년부터 실시하는 중국-홍콩 금융상품 교차매매 프로그램인 리차이퉁(理財通)은 이를 극대화한 것이다. 홍콩의 금융상품을 중국본토 내 개인/기관 투자자들이 직접 구매할 수 있게 되어서 셀수없이 많은 차이나머니가 홍콩에 들어와서 시위와 코로나 판데믹으로 경제가 주춤했던 홍콩경제에 새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고 반대로 중국에도 홍콩을 통해 수많은 외자가 들어오며 그간 이런저런 제약으로 중국 직접투자가 힘들던 외국인들에게 홍콩을 발판으로 한 새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이미 중국 없이 홍콩은 굶어 죽는 신세다. 특히 2017년 대만구(大灣區) 전략에 따라 홍콩은 마카오 및 본토 광동성과 같은 경제공동체로 묶이게 되었으며 이것은 홍콩 자신들도 중국 중앙정부도 그리고 중국을 상대하는 외국 기업들이나 국가들에게도 모두 좋은 윈윈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배후가 있는 한 홍콩은 절대 죽을 수 없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고 홍콩에서 자꾸 우산혁명이니 뭐니 시위가 벌어지자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인 일반인들은 홍콩이 미래가 없고 무용지물이라며 멋 모르고 평가절하하고 뜬구름 잡는 자유나 인권 타령이나 한다. 이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안 보는 것이다. 중국경제와 홍콩의 연동은 홍콩에게는 복이면 복이지 절대 독이 아니다.
홍콩에서 벌어지는 각종 시위라든가 국가보안법, 반국가분열법 홍콩 부분 적용 등 중국과 관련된 각종 정치문제로 단순히 “이제 우리가 알던 홍콩은 죽었다”는 말은 망언이자 폭론에 불과하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된다. 홍콩이 원래 “무엇”을 위해 존재하게 된 곳인지를 다들 잊어버린 것 같다. 한국인들은 중국과 홍콩을 따로 분리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태생부터 둘은 절대 분리할 수 없었다. 애초 영국인들이 청나라 전체를 식민지로 삼는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중국 내지에 어떻게든 진입하고는 싶어 베이스캠프이자 현관으로 낙점한 땅이 홍콩이었다. 홍콩은 당장 중세에 포르투갈인들이 조차한 또 다른 식민지 마카오(澳門)과도 가깝다. 그리고 공행무역이 이미 실시되던 광저우(廣州)는 홍콩에서 당시 뱃길로 하루면 가는 곳이었다. 그러한 강점들이 있어서 직접 진입이 힘든 중국에 진출하고자 영국은 홍콩을 창구로 낙점했으며 적어도 그 본연의 기능은 단 한번도 중단되지도, 누구에 의해 대체되지도 않았다. 비록 중국의 공산화로 잠깐 주춤하기는 했지만 그 삼엄하던 죽의 장막이 쳐진 냉전 시절에도 홍콩을 통해 서양에서 중국 동태를 파악하고는 했다. 항공기를 이용해 제한적으로나마 중국본토에 진입해 이것저것 취재하고 조사하고는 하던 시절이 1979년 이전의 냉전시절이다. 그리고 중국이 구소련이나 북한과 달리 아주 손쉽게 개혁개방이라는 현명한 선택을 한 계기 역시 홍콩의 존재가 수훈이 컸다. 바로 발 밑에 서방과 통하는 창구로서 자신들과 서방 사이의 중재지가 존재하니 개혁개방을 하는게 이득이 되지 않고 못배겼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이 본연의 기능인 중국으로 통하는 현관, 중국 진출의 베이스캠프는 더 중요해지면 중요해지지 덜 중요해지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홍콩의 이 본연의 기능은 그 누구도 대체가 불가능하다. 너도나도 2019-20년 2년 간 홍콩의 정치불안(Social Unrest) 당시 “홍콩을 대체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결국 아무도 못했다. 그건 그들이 중국으로의 현관, 중국으로 가는 베이스캠프가 결코 될 수 없어서이다. 대한민국 서울이나 일본 도쿄 등은 중국과 아예 다른 나라다. 여기서 중국에 직접 들어가기는 매우 어렵다. 그나마 한국보다 더 먼저 중국과 수교한 일본은 나름 노하우가 있긴 하지만 한계가 있다. 나라가 다른거 자체가 한계다. 중국계 화교가 70%에 홍콩과 동남아시아 허브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 싱가폴 역시 이것은 마찬가지다. 싱가폴은 “중국계” 혈통이 우세하지 중국에 속하진 않은 엄연한 외국이고 여기서 중국본토는 들어가기 아주 까다롭다. 대만의 타이베이는 중국본토에 점령당해 흡수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리고 대만 자체도 외국인에 배타적이라 금융허브로 발달이 어렵다. 당장 대만 증권시장의 크레딧부터 아주 형편없다. 그런 판국에 무슨 남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겠나. 같은 중국 특별행정구 마카오가 있다만 마카오는 너무 작고 금융이 아닌 관광/오락산업이 주축인 지 오래다. 대만구 계획에서도 마카오의 역할은 관광/오락사업으로 정해진 지 오래다. 자체 증권시장도 없어 마카오 기업들도 카지노 소유사 샌즈(Sands) 등이 홍콩증시에 상장되었다. 결국 그 누구도 홍콩의 기능을 대체할 수 없으며 홍콩을 대체하니 하는 건 망상에 불과한 셈이다. 아주 현실성 없는 거짓말이다.
홍콩의 정치 리스크라는 건 결국 지엽적인 것이며 본질이 아니다. 우리는 이젠 본질을 봐야한다. 앞으로 홍콩의 역할은 더 중요해질 뿐이지 절대 홍콩은 죽지 않는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대중의 반중감정이 아닌 실리를 직시하는 혜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