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칼럼) 빅테크와 대중역학과 ‘디지털 민주주의’
러시아에선 푸틴 대통령에 반대하는 앱의 일종인 ‘스마트 투표’ 때문에 말이 많았다. 푸틴의 장기집권과 무리한 임기 연장을 앱 공간에서 지탄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여과없이 담긴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러시아 아이폰 앱스토어에서 문제의 앱이 사라져버렸다. 사실상 애플과 구글이 푸틴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평소 입버릇처럼 국제법과 한 국가의 국내법을 성실히 준수하겠다고 한 두 회사가 결국 전자보단, 후자의 압박에 꼬리를 내린 셈이다.
그 동안 독재자들은 애플,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의 국제적 영향력에 늘 입맛을 다시곤 했다. 때론 자신들의 부당한 정치적 명분을 억지로 합리화하는데 이들을 동원하거나, 자신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앱이나 SNS, 메시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옥죄곤 했다. 이들 빅테크 역시 권위주의적이거나 반민주적 통치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줄타기를 해왔다. 그러던 것이 이번엔 쉽고도 ‘편한 길’을 선택했다. 사용자들의 정치적 권리에 봉사하기보단, 권력에 편승하거나 굴복하면서 당장의 거대한 수익을 챙기는 쪽을 택한 것이다.
워싱턴 비영리 프리덤 하우스에 따르면 전세계 인터넷 자유도는 5년 연속 감소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국가들이 “비폭력적인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발언”을 이유로 인터넷 사용자들을 체포하면서 “전례 없는 긴장과 억압”을 가하고 있다. 적어도 20개국에서 인터넷 접속을 중단했고, 미국만 해도 21개 주가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대한 접근을 차단했다. 특히 중국은 가장 악명이 높다. 이미 중국 당국의 인터넷 규제 사례는 디지털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교범’으로 꼽힐 만하다. 터키도 비슷하다. 일일 사용자가 100만 명이 넘는 플랫폼의 경우 만약 “문제있는” 콘텐츠를 48시간 이내에 없애지 않으면, 가차없는 처벌이 가해진다.
하긴 디지털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적은 그 뿐 아니다. 과학자나 전문가 그들만이 제일 잘났다고 군림하는 ‘기술 제국주의’ 내지 엘리뜨주의가 그것이다. 자신들의 판단과 능력, 기술력만이 디지털 시대를 좌우한다는 맹신이다. 소위 ‘자기통치(self-government)’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이들은 배타적 성벽을 쌓고, 대중을 철저히 소외시킨다. 하긴 기술 엘리뜨의 그런 독선적인 독사(doxa)는 연원이 깊다. 20세기 초 물리학자 마이클 폴라니부터가 “오직 전문가들만이 과학의 궤적에 관해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고, ‘대중의 의지’는 그러한 숙의 과정에서 전혀 기여할 수 없다”고 교만을 떨었다.
허나 1990년대 이후 미국 시민사회는 ‘대중역학’으로 이를 맞받아쳤다. 과학기술의 엘리트화가 아닌, 대중적 공유를 지향하자는 것이다. 즉 “일반인들이 주체가 되어 질병 등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 정보를 수집하고, 전문가들의 지식과 자원을 동원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익숙한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는 과학자보다 일반 대중이 더 잘 안다고 가정한다. 디지털 기술의 생성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데이터 제공자에만 머무르지 않고, 애그리게이터의 독점을 견제하면서 가설 수립, 연구 설계, 데이터 수집, 데이터 분석에 관여하는 것이다.
빅테크 기업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나, 기술 엘리뜨주의에 맞선 대중역학은 무늬는 다르지만, 민주주의를 위한 내적 모순 내지 그 극복이란 점에서 본질은 같다. 둘 다 현대 디지털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이자, 이에 맞선 길항의 과정이다. 일찍이 구글의 야망은 창대했다. 불의에 맞서 “Don't Be Evil(악마가 되지말라)”이라고 한, 공동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의 사업철학에서 오늘의 신화가 싹텄다. 이에 비해 ‘대중역학’은 “기술적(전문적)인 것과 비기술적(비전문적)인 것 사이의 경계는 없다”는 보편의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철학과 믿음 역시 디지털 민주주의의 또 다른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