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 정부와 암호화폐
최근 중국 칭하이성과 신장 위구르 자치구, 그리고 미국 뉴욕주까지 암호화폐 채굴을 금지하거나 할 예정이라고 한다. 천방지축 널뛰는 암호화폐의 속성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소식이 더욱 눈에 띈다. 지구 반대편 엘살바도르 정부가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화(法貨)로 지정한다는 것이다. 우리로 말하면 한국은행이 원화 대신 비트코인을 공식 화폐로 지정하는 격이고 보면, 이거야말로 놀라운 소식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각국 정부가 법적 효력을 지닌 디지털 화폐를 개발하거나, 계획하고는 있지만 이 경우와는 다르다. 비트코인을 유일한 법화의 자리에 앉힘으로써 중앙은행의 발권 기능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사변가들의 담론 수준에만 머물렀던 화폐의 대전환이나, ‘화폐’의 종말이 그 조짐을 보인다고나 할까. 물론 엘살바도르의 이번 결정은 예외적 상황일 수 있다. 나라 경제가 거덜이 나고, 해외 친지나 가족이 부쳐주는 돈으로 먹고살다시피 하다보니, 송금 수수료를 아끼느라 벌어진 일이긴 하다. 그럼에도 결코 ‘예외’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새삼스럽지만 암호화폐의 인문학적 함의를 따지자면, 그 중요한 키워드는 ‘해체’다. 근대 국민국가 이래 중앙 권력이 강제한 단일한 교환수단으로서 화폐의 힘에 균열을 가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중앙집권의 권위적 스키마를 전복하는 최초의 의미있는 화폐 행위로 나타난 것이 암호화폐라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남미의 한 작은 나라의 일이 결코 작게 보이지 않는다. 행여 그것이 모종의 ‘나비 효과’를 부르진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마치 ‘하인리히의 법칙’처럼 교환과 저장 수단의 인류사적 대변혁을 암시하는 작은 징후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은 어떨까. 만약 새롭게 전환될 화폐나, 혹은 그 비슷한 교환매체가 현행 화폐를 대체한다면…. 이는 분명 법화(法貨)나 달러 같은 기축통화와도 다를 것이다. 그 정확한 실체를 당장 예측하긴 어렵지만, 분명하게 짐작이 가는 사실은 있다. 손쉽게 상상할 수 있는 미래 화폐의 요건은 교환가치와 저장성뿐 아니라, 집중이 아닌 분산, 투명성과 신뢰라는 점이다. 이는 수 년 전부터 암호화폐를 둘러싸고 문제가 되었던 ‘화폐의 조건’과도 흡사하다.
암호화폐의 ‘화폐다운 조건’은 무엇일까. 이는 엘살바도르 정부가 내린 결정의 가장 큰 배경이기도 하다. 즉 송금 수수로를 가로채는 중개자를 생략하고, 한층 원활하게 실시간에 가까운 거래를 하는게 목적이다. 곧 블록체인의 등장과 존재의 이유와도 같다. 금전거래나 송금, 증명서 등 모든 인간사의 거래 내역이 수많은 노드와 참여자들에게 분산된 거래원장(Ledger)에서 이뤄진다. 비트코인 네트워크의 경우 10분마다 새롭게 심장이 박동한다. 그때마다 수많은 거래와 교환과 변동을 새롭게 기록하고, 원장 변조를 방지하는 ‘고쳐쓰기’가 이뤄진다.
그래서 인터넷이 ‘www’(world wide web)이라면, 블록체인은 ‘wwl’(world wide ledger)이다. 지구촌 개개인의 컴퓨터마다 거래원장을 분산, 저장하고 있으며, 그렇게 분산된 원장은 또한 블록체인에 참여한 만인이 실시간으로 들여다보고 있어, 속일 수도 없고 해킹도 불가능하다. 송금 거래의 경우 이를 작동케 하는 암호가 그 거래 자체를 담보함으로써 부의 이전과 함께 저장 기능도 발휘한다.
그렇다면 엘살바도르 정부의 결정을 가십꺼리로 볼 것만은 아니다. 자신들의 막대한 이전수입의 수수료를 아끼는게 물론 표면상의 이유이긴 하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화폐와 공유체계에 대한 나름의 고심이 엿보인다. 새로운 온라인거래 ‘툴’을 반복해서 만들고, 모든 이가 승인하고 구축한 암호체계로 가치를 매기며, 공유와 교환의 매개로 삼는다는 블록체인 기반의 화폐 문명에 대한 기대도 스며있는 것이다. 그들이 의식했건 아니건, 어쩌면 미래형의 올바른 화폐에 대한 염원일 수도 있다. 작은 나라 엘살바도르의 선택은 그래서 무척이나 큰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