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또 한번의 탈선형적 기술
메타버스는 하이퍼텍스트한 4차산업혁명의 작은 곁텍스트일수도 있다. 이는 물리적 실재(實在)와 가상이, 실재와 유사한 경험을 하도록 하는 ‘실감기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가상 아닌 가상세계’ 비슷한 그것은 NFT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융합적 사유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말이 좋아 융합이지, 공상과 가상, 현실을 뒤범벅해 인간 경험치를 극대화하려는 욕망의 도구라고 해도 무방하다.
암호화폐라는 멀쩡한 호칭을 두고 굳이 ‘가상화폐’로 부르듯이, 애초 ‘가상’이란 말에는 가보지 않은 길을 거부하는 수구적 경멸이 다분히 배어있다. 메타버스는 그런 경멸을 되받아치는 진보적 경멸이라고 할까. 가상과 실상의 경계를 아예 없애버리며, 모든 미지의 경험을 현재화하고 말았다. 어원 자체가 그렇다. 추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가 합친, ‘추상화된 우주’다. 그것은 가보지 않은 세계나 우주의 시공간과 특성과 관념을 추출하여 형상화한다. 기왕의 증강현실에 더해 그 보다 더 확장된 거울세계, 행동과 경험을 재현하는 라이프로깅, 그리고 가상세계가 어우러지며 각각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이다. 정녕 ‘실감’을 선사하는 기술이다.
이런 메타버스 기술이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기차게 쓰여진다 싶더니, 이젠 교육이나 게임, HCI, 쌍방향 미디어 등으로 확산되고 있는 조짐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블록체인과 클라우드 기반의 메타버스가 있다. 이는 ‘또 다른 나’인 아바타를 현실과 가상세계에 보내 ‘나’ 대신 행동하고 교류하게 한다. 나를 대신한 ‘또 다른 나’가 내 삶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과의 쌍방향을 넘어선, 내가 타자화된 나와 함께 살며, 현실과 연계된 하이브리드 삶을 사는 것이다. 그야말로 존재론적 역발상이 기술의 원천이 된 셈이다.
지금은 개인의 삶과 실존적 경험이 높이 평가되는 세상이다. 그런 것들이 현실과 가상 공간에서 수많은 원고로 번역되고 만인의 텍스트로 유통되고 있다. 메타버스는 그런 시대의 유행을 시장화하고, 소비의 대상으로 치환한 것이다. 추상화한 디지털 삶을 통해 가보지 않았고, 갈 수도 없었던 또 다른 ‘현실’을 획득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가상도 실재도 아니요, 디지로그 비슷한 섞임의 마법을 통한 뉴프런티어십의 영감을 눈앞에서 내 몸이 겪고 느끼게 한 것이다.
비약하자면, 메타버스 안에선 아이디어, 이미지, 코드, 지식, 사회적 관계 등 ‘외부경제’의 것들이 생산행위의 중심에 설 수도 있다. 이들은 물질적 자원과 가공, 유통, 소비로 이어지던 전통적 생산물과는 별개의 생산세계다. 안토니오 네그리가 말한 ‘삶정치적 생산물’과도 비슷하다. 고전적 경제학자들이 경제같지 않은 경제라며 ‘불경제’(不經濟 ․ diseconomy)로 불렀던 요소들을 생산과 경제의 핵심 테마로 격상시킬 수도 있다. 그 결과는 실재와 가상현실을 넘나들며 무한한 상상계가 펼쳐질 것이라던 4차산업혁명의 조감도가 눈앞에 펼쳐지게 한 것이다.
디지털혁명이 20세기 전자적 산업혁명과는 다른 점은 하이퍼텍스트 기능이다. 메타버스는 그런 점에서 닮았다. 아니 닮았다기 보단, 인류 태초 이래 지속되어온 만물의 순서와 선형성을 깬다는 점에선 가장 흡사하게 하이퍼텍스트 혁명에 다가가는 셈이다. 현재적 인간의 모든 것을 가상공간에 재현하는 수준 정도야 그렇다다치자. 기존의 가상세계에다 물리적 세계를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현실의 정보를 더해 확장시키며, 시공간을 4차원의 서사로 재현한다는 점에선 메타언어의 생활화로 칭송할 만하다. 그 놀라운 경지가 NFT를 빌미로 우리네 실생활 속에서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또 한 번의 탈선형적 기술의 서사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