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바둑기사의 ‘정석’

2021-03-01     박경만 주필

신진서 9단이 중국의 바둑황제 커제9단을 꺾었다. 중국 바둑을 평정하며 명실상부한 세계 바둑의 제왕으로 거듭난 것이다. 한 판 승부가 끝난후 바둑계에선 신진서가 커제를 물리칠 수 있었던 묘수를 두고 아직도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여러 해석과 훈수가 나오고 있지만 가장 많이 들리는 얘기는 ‘바둑의 정석(定石)’을 깨버렸다는 평가다. 경기를 지켜보던 국내외 바둑의 고수들은 바둑의 상식을 깨는 희한한 묘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이번 경기를 스스로 복기해본 ‘AI 바둑기사’의 정석 아닌 정석이 이 참에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신진서의 한 수 한 수가 AI급의 ‘탈(脫)정석’과 사뭇 닮았다는 것이다.

신진서는 그간 바둑판의 질서를 깡그리 무시했다. 하변 백일단을 취한 후 좌변 흑일단을 수습해야 할 지경에 처한 신지서는 모든 바둑세계의 예상을 깨고, 상대 백의 사이에 돌을 끼워넣었다. 흑의 끼움수에 대해 커제는 나중에 “전혀 예상치 못한 한 수에 당황했다”고 토로했다. 또 집 확보를 위한 저항으로 던진 커제의 한 수에, 신진서는 전혀 다른 엉뚱한 수로 대응함으로써 커제의 백집을 줄어들게 하고, 어렵사리 주어진 반격의 기회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흑을 쥔 신지서가 백의 ‘아다리’ 올가미를 무시하고, 그 사이에 돌을 놓은 것 차제가 상식 밖이었다. 프로는 물론 아마튜어 세계에서도 용납키 어려운 패착이다. 그러나 백이 다음 수를 던지기 한 발 앞서, 다시 그 사이를 빠져나오는 돌을 놓음으로써 정석의 틀 자체를 깨버렸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또한 바둑 사상 있을 수 없는 엉뚱한 패착이 승착이 되어버린 것이다.

애초 초반의 포석은 물론, 집을 지키고 상대방 집을 허물고 빼앗는 와중에도 정석은 지켜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신진서나, AI바둑기사의 가상 판세 읽기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래서 이미 바둑계에선 AI 바둑기사들이 최고 고수로 통한다. AI기사들은 바둑판 381칸 전체를 꿰뚫고, 상대방의 관성이나 예상되는 경우의 수까지 읽어낸다. 그야말로 창조적 모델 생성능력, 즉 GAN과 전이학습의 극대화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GAN의 등장으로 AI는 모방이나 학습의 응용 단계가 아닌, 창조적인 생성 모델의 시대를 열었다. 판단과 추리의 근거가 될 데이터의 양이 충분하지 않아도 된다. 기왕에 인지하고 훈련되었던 자료를 재활용해서 미처 알 수 없었던 사실이나 이미지까지도 능동적, 창조적으로 추리하고 판단해낸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알아내는 AI의 초능력은 특히 대상을 감별하고 응용하기 위한 이미지 선별이나 분류작업에서 빛을 발한다. AI는 아무리 선험 데이터가 빈약하더라도, 이미지넷 전체 데이터를 통해 학습한 기본 모델을 활용하여, 이미지넷에는 없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선험학습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상상과 추리, 응용 등을 감행하는, 천재 그 이상의 재능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걸 두고 전이학습이라고 한다. 그런 전이학습과 GAN 따위로 무장하며, 수백만, 수천만의 ‘경우의 수’를 체험한 AI바둑기사를 인간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미 ‘포스트 이세돌’의 국면에서 AI 프로기사는 바둑계의 스승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AI기사 ‘카타고’는 인간 프로기사 내지 1~3급 정도 이상의 고수들이 실력을 배양하는 맞수 대상으로 인기 폭발이다. 이번 대회를 지켜본 바둑 고수들은 그래서 “인간은 결코 바둑에서 AI를 당할 순 없다”고 단언한다. 인간의 뉴런을 무색하게 하는 심층 퍼셉트론과 활성함수로 무장하고,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공식과 팩트를 스스로 생성해내는 존재론적 초능력을 가진 AI기사를 당해낼 리 만무다. 물론 커재를 꺾은 신진서에 대해선 AI수준의 초능력 소유자로 칭송할 만하다. 그렇다면 신진서가 AI프로기사와 한판 붙는다면? 모르긴 해도 승산은 희박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