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하우스’의 심리학

2021-02-07     박경만 주필

SNS 시대엔 ‘고독하지 않은 고독’의 투명함이 지배한다. 한 순간도 쉴 틈 없이 우린 인스턴트 메시지로 넓고 얕은 의사소통을 소비하느라 분주하다. 그럼에도 클릭과 엄지로 규합된 디지털 군중 속의 외로움은 더 깊어간다. ‘단절(斷絶) 아닌 단절’로 연결되는 단속(斷續)이 난무하며 일도양단격의 삶의 효용으로 굳어버린게 디지털 시대의 초상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에 좀 진력이 나서일까. 이젠 더 새로운게 등장했다. ‘모두’가 아닌 ‘우리들의 방’이라고 할 소셜미디어, 클럽하우스가 그것이다.

생긴지 1년도 채 안되는 클럽하우스는 음성으로 대화를 나눈다. 문자나 이미지, 영상과는 또 다른 ‘별미’가 있다고 할까. 아무나 접속할 수 없고, 기존 가입자로부터 초대장을 받은 사람만 가입할 수 있다. 자신이 직접 가입하고 친구를 추가하면 사용할 수 있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과는 다르다. 그렇게 초대받은 자가 세계적으로 이미 200만이 넘었다. 들어가보면 ‘영어 스페인어 교환방’, ‘일본어 중국어 연습방’, 5분 수다방, ‘프랑스어로 정치 이야기하기방’등과 같은 방이 있다. 자신의 취향이나 관심사를 따라 여행, 잡담, 마케팅, 크리에이티브, 언어 등 이 방, 저 방을 골라 수다를 떨거나, 경청하면 된다.

얼핏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연상케하지만, 말로 대화하는 것과 문자나 사진만 주고받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각 방은 오붓한 소모임같기도 하고, 지인이나 가족 모임같기도 하다. 어떤 때는 거대한 강당에서 무대위 출연자의 청중이 된 듯도 하다. 방마다 일종의 좌장격인 ‘방장’이 있다. 남의 말을 듣다가, 나도 할 말이 있으면 손(모양 아이콘)을 든다. 그러면 ‘스피커’로 격상된다. 스피커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마치 무대에 올라가는 것처럼 이름이 올라가고, 발언권이 주어지며 하고싶은 말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클럽하우스 참가자들의 의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일단은 ‘코로나’ 신드롬에 대한 저항임엔 분명하다. 외부활동이 위축되며 사람을 만날 기회가 줄어들자 문자나 사진, 영상보단 실제로 목소리로 대화하고픈 것이다. 사람이 그리운 터에 ‘음성 지문’을 주고받으며, 원격 체온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라고 하겠다. 문자는 답답하고, 영상통화는 내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 부담되고, 그 중간으로 택한게 음성 버전의 클럽하우스인 것이다.

이른바 ‘셀럽’도 클럽하우스 열풍을 부추기고 있다. 사소한 잡담으로 소일하다가, 때론 일론 머스크와 같은 인물의 아이디어 소개담을 듣게되는 횡재도 하게 된다. 온갖 창업가들이 명함을 내밀고, 기업인과 유명 정치인, 엔터테이너 등과 직접 목소리로 대화할 수 있다. 그들의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인생의 중요한 키워드도 얻을 수 있다. 기껏해봐야 토막토막 몇 구절로 맺어지는 ‘페친’ 따위와 비할 게 아니다. 그래서 실리콘 밸리의 두 천재가 잡담꺼리로 만든 직후부터 스타트업 창업자들과 내로라 하는 벤처 투자자들이 초대장을 받느라 줄을 서곤 했다.

하지만 정작 주목할게 있다. 클럽하우스의 행간에는 이 시대의 만성질환과도 같은 과잉접속에 대한 경계심이 어른거린다고 할까. 지금의 SNS세상은 진정한 고독이나 진정성 있는 어울림, 그 어느 쪽도 허용되지 않는다. 정보과잉 속에서 지식을 씹을 수 있는 어금니는 날로 허약해지며, 네트워크상에서 난삽한 주절거림만 어지럽게 소비되면서, 낯선 경험과 경청할 만한 ‘타자’는 철저하게 차단된다. 그러다가 혹여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은 확장되지 않고, 진정한 ‘창조’는 불가능하게 되진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디지털 ‘성벽’ 바깥에서 또 다른 경험의 본질을 만날 필요가 있다. 셀럽과의 호사스런 스킨십도 좋고, 수다를 떠는 것도 좋다. 진정한 고독 속의 참된 인문적 사유를 단련하는 것은 더 좋다. 물론 클럽하우스가 그런 충분조건을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까다롭게 초대받은 자들만 말을 섞으려는, ‘차별’과 배제의 심리가 그렇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