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요금 체계 개편
전기요금 체계가 바뀐다. 연료비 변동에 따라 요금이 달라진다. 한전의 요구가 반영된 요금체계 개편이다. 하지만 시장 구조는 그대로다.
전기요금 체계가 7년 만에 개편됐다. 연료비 변동분을 3개월마다 전기요금에 반영하는 새 전기요금체계를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른바 연료비 연동제다. 내년 1월부터 도입된다. 개편된 새 전기요금의 핵심 내용은 ▲원가변동요인을 전기요금에 반영하는 '연료비 조정요금' 신설과 ▲'기후·환경요금' 분리 고지다. 이밖에 ▲'주택용 필수사용공제 할인제도' 개선 ▲'주택용 계시별 선택 요금제' 단계적 도입 ▲'특례할인제도' 정비 등도 주요 개편 내용이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물론 생산할 때 들어가는 연료의 가격을 전기료에 반영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석탄·LNG·석유 가격이 오를 때 전기요금도 함께 오르고, 연료 가격이 내려가면 전기요금도 함께 낮아지는 전기요금 체계다.
코로나 19로 국제유가가 안정돼 있어 당장은 인하될 것으로 보인다. 내년 1분기 4인가구 기준 전기요금이 1050원 내리고, 2분기엔 1750원 내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연료비 연동제 소비자들은 단기적으로 전기요금 절감 효과를 누리게 됐다.
개편의 배경
개편된 전기요금체계는 그동안 한전이 꾸준히 주창해온 '합리적인 전기요금체계 구축'을 위한 조치들이 상당 부분 반영됐다. 동시에 "현 정부 임기 내에 전기요금 인상은 없다"는 정부의 약속도 지킬 수 있는 요금체계다.‘
코로나19와 그에 따른 유가 급락으로 "현 정부 임기 내 전기요금 인상 없다"는 정부의 공언과 "합리적인 전기요금체계 도입"이라는 한국전력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전기요금체계 개편을 가능하게 해 준 셈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지난해까지 한전은 고유가와 원전 가동률 저하로 연간 수천억 원에서 1조 원 대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경영압박을 받았지만, 정부는 자칫 전기요금 인상으로 비춰질 수 있는 전기요금 개편을 미뤄왔다. 그러다가 국제유가 하락으로 연료비 연동제를 도입해도 전기요금이 오르지 않을 상황이 되자, 정부는 비로소 한전의 요구를 수용하게 됐다.
왜곡된 요금체계
정부는 2013년 11월 이후 7년 동안 전기요금을 묶어 놨다. 표면적인 이유는 물가 안정이었다. 이 기간 한전의 실적은 급등락을 거듭했다. 저유가가 지속되던 지난 2015~2016년 당시 한전은 10조가 넘는 대규모 흑자를 냈다.
반면 기름값이 비쌌던 지난해의 경우 한전은 1조3000억원에 가까운 적자를 냈다. 2016년 104조원이던 부채는 이제 132조원에 이른다. 한 나라의 에너지를 책임지는 공기업의 재무구조치고는 너무 취약하다. 정부가 전기요금 체계를 원가연계형으로 바꾼 이유다.
사실 한국은 전기요금이 싼 편이다. 지난해 국제에너지기구(IEA) 발표에 따르면 1인당 전기요금이 세계 주요 28개국 가운데 두 번째로 저렴했다. 일본의 전기료는 한국의 2배이고 전기 생산용 석유가 생산되는 미국도 한국보다 비싸다. 질 좋은 전기를 값싸게 이용하는 것은 좋지만 문제가 있다. 에너지 소비 왜곡으로 인해 자원 낭비와 환경오염이 심해지는 것이다.
유가가 오르면
문제는 향후 세계 경기가 회복되면서 국제유가가 상승할 때다. 향후 국제유가 상승이나 탈원전·탈석탄 속도에 따라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높아지게 되면 전기료가 인상돼 그 부담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정부의 전기요금 체계 개편안은 지난 15일 공개된 전력수급 기본계획과 맥을 같이한다. 정부는 이날 원전을 2024년 26기에서 2034년 17기까지 줄인다고 밝힌 바 있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30년 넘게 가동한 석탄발전소도 30기를 폐기한다.
그 대신 액화천연가스(LNG)와 신재생에너지는 대폭 늘린다. LNG 설비용량은 올해 41.3기가와트(GW)에서 2034년 59.1GW로 확대한다. 또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는 탈원전과 코로나19 이후 그린뉴딜 정책을 반영해 2030년 20.1GW에서 2034년 77.8GW로 늘어난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난해 원전 발전 원가는 kWh당 56원으로, 154.5원이었던 LNG 발전원가보다 약 3배 저렴했다. 발전 구매단가가 가장 싼 원전을 더 비싸고 외국에서 전량 수입하는 LNG나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할 경우 전기요금은 오를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다.
급격한 인상·인하를 대비해 ㎾h당 최대 ±5원 범위에서 직전 요금 대비 1회당 3원까지만 변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등 보호장치를 뒀지만, 유가가 올라가면 요금도 일정 수준 올라갈 수밖에 없다. 국제유가 변동은 6개월의 시차를 두고 연료비에 반영된다.
필요한 구조 개편
요금체계 개편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목적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전력 시장 구조는 그대로다. 연료비 조정요금에는 상·하한선이 씌워져 있고 정부가 요금 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돼 있다. 문제는 시장이 아닌 정부가 전력 도·소매가격을 결정하면서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한전이 전기요금을 조정하려면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야 한다. 심의는 전기위원회에서 진행하지만 산업부 산하에 있다.
IEA도 지난달 발표한 '한국 에너지 정책 국가보고서'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은 모두 정부가 한다"며 "독립적 규제기관을 도입하지 못한 점은 한국의 에너지전환을 가로막는 주요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업계에서는 전기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위원회에서 자체적으로 전기·가스·열 등 에너지 비용 구조 검증과 요금 수준을 결정하자는 것이다. 전기요금 체계 개편은 끝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