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U와 디지털 철학
IT세상은 변화무쌍하다. 컴퓨터 3D게임에나 유용했음직한 GPU가 이제 와선 모든 컴퓨팅의 핵심 장치가 될 것이라고도 한다. 장차 CPU의 역할을 넘어설 것이란 예상이 이젠 상식이 되고 있다. 게임 뿐 아니다. 빅데이터 마이닝, AI옵스의 원활한 작동의 엔진이 되면서 인공지능 시대의 주역으로 승격되는 것도 시간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 GPU의 비결은 다른데 있지 않다. 기존 CPU의 정보처리 방식, 즉 여러 정보를 시간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혹은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하는 순차처리를 배제한 것이다. 대신에 복수의 처리 장치로 프로그램상의 서로 다른 작업을 일거에 처리해버린다. 개별 처리 장치의 작업 부하도 줄어들어 속도도 엄청 빨라졌다. 생뚱맞은 해석인지 모르나, 이는 2진법적 디지털 문명의 시원(始原)과도 닮았다.
디지털 문명, 곧 ‘digit’는 0과 1의 교접과 순환이다. 애초 라이프니쯔의 2진법에서 발원했고, 더 거슬러 올라가선 그가 충격 속에 벤치마킹했던 주역의 음양오행론에까지 맥이 닿는다. 그 하위의 ‘태극’은 음양이 ‘밀고 당기며’ 길항(拮抗․conflict)하는 역동적 조합이며, 생성의 원리를 함축한 변증법적 다이어그램이자, 디지털 문명의 철학적 근원이라 할 만하다. 이는 이질적인 데이터들을 음양, 곧 0과 1이라는 서로 다른 단위체계로 변환하고, 그 ‘다름’의 모순을 새롭게 조합하는 논리의 원형이다. 묘하게도 여기서 다시 GPU의 원리를 소환하게 한다. 하나의 프로그램상에서 여러 처리장치가 복수의 작업을 병렬 처리하는 GPU 또한 0과 1이 한꺼번에 병행하고 교접하는 이치와 겹쳐보인다.
사실 그렇다. 첨단의 기계문명이라고 할 IT와 디지털 기제는 오히려 탈기계적 성찰의 결과라고 할 인문 철학과 맥이 닿곤 한다. 객체지향 프로그래밍(Object-Oriented Programming, OOP)의 원리도 그런 식의 해석이 가능하다. OOP는 귀납이 아닌 연역의 순서로 클래스(class)를 먼저 디자인하고 그것으로부터 객체(오브젝트)를 생성한다. 프로그램을 여러 기능으로 나누고 모쥴을 편성해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기존의 C나 베이직, 파스칼 등 프로세싱 언어의 귀납 방식과는 정반대다. 아예 데이터가 도착한 객체를 단위로 아예 클래스부터 설정하고, 그로부터 메시지를 처리하는 식이다. 속도도 빠르고 해서 이젠 인공지능 시대의 유력한 SW방식으로 부상했다.
그런 OOP 역시 인문학의 지평 어디선가 본 듯도 하다. 다소 비약인지 모르나 그건 ‘플라톤’류의 이데아론을 연상케도 한다. 이데아로부터 개별적 도상과 시뮬라크르가 생성된다는 플라톤의 설정은 전형적인 연역적 시각의 우주관이다. 굳이 떠올리자면 OOP 역시 그런 질서와 다소나마 닮아보인다. 모쥴부터 시작해 순차적으로 정보 처리를 하는 기존 절차 언어와는 달리, 대뜸 클래스부터 설계한 후 객체는 객체대로 그에 따라 메시지를 처리토록 한 점이 그렇다. 특이하다 싶을 만큼 고대 철학의 원류와 21세기 최첨단의 IT기술이 시공을 초월한 기의를 사이좋게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하긴 ‘호모 퓨저니쿠스’의 화두인 ‘융합’의 본딧말도 역시 기계와 탈기계의 경계를 해체한데서 흘러나온 개념이다. 온-오프 컴퓨터 논리연산방식엔 이미 희로애락으로 점철되는 삶과의 융합 의지가 함뿍 스며있다. 바이오 메카트로닉스, 바이오 인포매틱스, 사이보그 등의 현실이 그렇다. 요즘 유행하는 에듀테인먼트, 유니섹스, 팩션 등 사회․문화적으로 모순된 조화들도 마찬가지다. ‘NBIC’, 즉 N(나노기술), B(생명기술), I(정보기술), C(인지기술)는 또 어떤가. 마땅히 인간과 사물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융합의 표상들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 철학적 복선의 기술들이 앞으로 미래를 지배할 것이다.
그야말로 ‘기술적인 기술’은 단명에 그치기 마련이다. 그 보단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한 인간세의 삶을 부축할 것인가? 물질과 정신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런 고뇌에서 싹튼 기술이야말로 인간을 이롭게 하는 무기가 된다. 문명의 자장에서 측량하기 어려운 중력을 갖는다. GPU만 해도 그렇지 않던가. 0과 1의 다름의 모순을 조합해 거대한 시너지로 토해내듯, 서로 다른 처리 장치들이 병렬로 제곱함으로써 그 역량은 엄청나게 불어난 사례다. 이처럼 디지털혁명은 ‘인간’과 기술의 이분법적 좌표를 넘어선 상상력의 세계를 요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문적 성찰을 재료로 할수록 그 기술의 힘은 크다. 기술도 철학이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