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산업혁명이 마주칠 ‘포스트 자본주의’?

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자본의 재탄생?’(5-2)

2018-02-05     박경만 주필
▲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미디어문예창작학과]

4차산업혁명이 마주칠 ‘포스트 자본주의’?

자본의 미래, 정확히는 자본주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4차산업혁명이라는, 가보지 않은 길 그 너머에서 여전히 자본주의는 전성기를 누릴 것인가? 식자층에선 이를 두고 온갖 예언과 식언이 난무한다. 다만 디지털기술과 공유경제의 쳇바퀴와 맞물려 자본주의에도 필경 새로운 형태의 위기가 올 것이란 불안은 팽배해있다. 물론 종래에도 ‘자본의 위기’는 단속적으로 나타났다가 극복되곤 했다. 자유경쟁구도의 균열이나 사적 소유에 대한 침해, 영리와 이윤 창출의 위기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들은 일단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통제력이 일시 약화됨으로써 겪은 일회성 위기였다. 그러나 미래의 상황은 전혀 다를 수도 있다.

언젠가는 비물질적 생산물, 즉 아이디어, 이미지, 코드, 지식, 사회적 관계 등이 경제와 생산행위의 중심에 설 수도 있다. 쉽게 말해 자원과 가공, 유통, 소비로 이어지던 생산체제, 그 외부에 존재했던 비물질적 생산물들이다. 이를 두고 네그리는 ‘삶정치적 생산물’이라고 했다. 재래의 경제학자들은 이를 두고 ‘외부경제’ 혹은 ‘불경제’(不經濟 ․ diseconomy)라고 했다. ‘경제같잖은 경제’라는, 다분히 경멸섞인 부정적 뉘앙스라고 할까. 그러던 것이 이젠 실제와 가상현실을 넘나들며 무한한 상상계(界)가 펼쳐질 4차산업혁명기 생산과 경제의 핵심 테마가 될 수도 있다는 예언이다.

그럼에도 재래식 버전의 자본주의는 예전에 노동, 자연과 같은 물질적 생산요소에게 했던 방식으로 이를 통제하려 할 것이다. 곧 이들에 대한 자본의 면역결핍증이다. 물질적 생산요소와는 달리, 이미지나 아이디어, 사회적 관계, 감성, 지식 등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은 창의와 자율성이 뒷받침된 극도의 인간적 산물이다. 새로 생산과정에 이식된 비물질적 요소에 대한 공감능력과 면역력이 떨어지는 20세기형 자본의 통제가 가해질 경우 어떻게 될까. 아마도 면역거부반응에 의해 생산력은 추락하며, 원활한 생산체제에 장애가 생기면서 자본의 위기가 초래될 수도 있다. 그런 위기는 이전과는 달리 일시적이 아닌, 항구적 내지 영속적이 될 수도 있다.

미래 자본주의의 앞날을 낙관하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다. 디지털기술의 눈부신 성능과 속도가 곧 생산력 발전을 견인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비물질적 요소의 생산력은 사람들의 능력과 창조성이 얼마나 양성되고 계발되었는가, 반면에 얼마나 많은 삶들이 낭비되었는가 등이 판단 기준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용없는 성장이나, 많은 사람들을 오로지 무용한 ‘소모품’으로 여기는 기존 자본의 태도는 일단 낙제점이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생산 능력을 충분히 계발하지 못하며, 잠재력과는 거리가 먼, 틀에 박힌 일들만 강제당한다. 반면에 진정한 생산력 발전은 사유하고 창조하는 힘, 이미지와 사회적 관계를 생성하는 힘, 소통하고 협력하는 힘을 촉진하는 노력 등에서 나온다.

오늘에 되살린 ‘슘페터’의 예언도 주목할 만 하다. 그는 반세기전 미래 자본주의의 병증으로 ‘기업가 능력’의 쇠퇴를 꼽았다. 기업문화의 관료화도 기업가 정신을 잃어버리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기업가 정신은 기업의 진정한 생명력이며, 새로움을 도입하고 창조의 즐거움에 이해 추동되는 혁신가의 자세를 말한다. 그런 논리라면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역시 슘페터의 ‘진정한 기업가’는 아니다. 기업의 얼굴로 새 모드의 상품을 내놓고, 그 성공적 판매에 판돈을 건 세일즈맨이자 위험을 감수한 투기꾼일 뿐이다. 그런 슘페터의 예측이 대체로 옳을 수도 있지만, 그도 미처 생각못한게 있다. 4차산업혁명 이후엔 기업이나 자본가 등 경제 엘리뜨에 앞서, 공유경제 네트워크의 숱한 다중(多衆)이 비물질적 생산체제의 1인 기업가이자 주체로 등장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긴 20세기 스타일의 자본주의적 축적은 2008년 금융위기로 종언을 고했는지도 모른다. 재화의 생산, 유통, 가치실현의 피드백에만 문제가 생겨서가 아니다. 그 깊숙한 바탕에 깔린 ‘삶정치적 생산’ 공정의 에러가 크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에 대한 묵시록적인 ‘붕괴론’이나, 막시즘의 계급투쟁식의 저주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생산과정에 대한 공적 통제, 즉 사회주의나 기든스의 ‘제 3의 길’과 같은 사민주의 전략도 답이 되지 못한다. 이들 역시 국가 관리란 점만 빼면, 궁극적으론 부의 재분배에 골몰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이복형제인 셈이다.

그렇다면 대체 포스트 캐피털리즘은 어떠해야 하는가? 모르긴 해도 지금껏 모든 경제 이데올로기가 미치지 못한 ‘삶정치적 생산’의 최적화, 그 충분조건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부의 분배 메커니즘을 뛰어넘는 근원적 생성의 메커니즘이 출현해야 할 것이다. 삶의 체험, 사회적 공유, 협력을 생산체제 안에 포섭, 통합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삶 전체를 원만하게 포섭하는 체제가 그것이다. ‘왜 사느냐?’는 물음에 답할 만한 인간 존재론적 차원의 생산이어야 하며, 진정한 ‘인간생성적’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야말로 진짜 ‘제3의 길’이다. 그게 언제 올진 알 수 없으나, 인내하며 오래도록 기다릴 만한 길이다.